1995년에 개봉한 도리스 되리의 영화 <파니 핑크>에서는 운명의 남자를 기다리는 29살 노처녀 파니 핑크(Fanny Fink)가 나온다. 그녀는 사랑에도, 삶에도 모두 수동적이었다. 나이가 먹어가며 자신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싫지만 그렇다고 아무 사랑이나 하고 싶지는 않은 섬세하고 순수한 여자이기도 했다. 파니 핑크가 항상 바라던 것은 조건이 대단한 남자가 아니다. 그저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주고 “날씨가 너무 좋아.”, “열쇠 잊지 마.” 같은 소소한 말을 나눌 수 있는 상대. 어쩌면 그녀에게 사랑은 인생에서 가장 평범하면서 가장 큰 일이었다.
주인공과 비슷한 나이 즈음 이 영화를 알게 되었고, '핑크'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보게 되었던 영화. 처음 보게 되었을 때 나는 파니핑크처럼 똑같이 사랑의 아픔을 겪고 불안한 위치 속에 힘들어했었다. 난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라고 적어놓은 일기장을 베개 밑에 밀어 넣고 펑펑 울었다. 일기장에 적은 열 글자 안에는 나도 포함됐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파니 핑크처럼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너무 나약하고 쉽게 부러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볼품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고독이 내 곁에 머물렀을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내 감정을 보듬어달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터놓고 이야기하기엔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부터 말해야 했을 것이다. 나에게, 그리고 그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부터 얘기해야 했을 것이다. 결국 나는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혼자서 독한 외로움을 견뎠다.
영화 <파니핑크>를 보다 보면 자의식이 강한 파니 핑크도 결국은 그녀의 친구 오르페오에게 고민을 터놓으며 힘을 얻는다. 자신도 힘든 일이 많지만 같이 걱정해주고 답을 찾아가는 오르페오. 그녀는 아마 곁에 있던 친구 덕분에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으리라. 오르페오는 슬픔 속에서도 춤을 추는 법을 가르쳐줬다. 변하는 것은 없지만 현실을 즐기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자신에게 늘 사랑을 채워주는 사람에게선 오묘한 빛이 난다. 파니 핑크는 내내 어두컴컴하고 검은 옷만 입고 다니는 여자지만, 나는 어느 시점에 그녀에게서 밝은 빛이 나는지안다.
샴페인이 따라진 유리잔을 보며 반이 찼다고 말하는 사람과 반이 비었다고 말하는 사람. 이 둘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영화의 주제곡이었던,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의 <Non, Je Regrette Rien> 노래가 흘러나오면 여전히 눈물이 나왔다. 엔딩 크레디트에서 모든 제작진들이 다 함께 서서 손을 잡고 이 샹송을 불러주는 장면이 생각 나서다. 그들이 웃으며 전해주는 노랫말은 내게 기운을 넣어주는 오르페오의 심령술 같은 거였다. 그래서 여전히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면이다.
아니요,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내게 줬던 행복이건 불행이건 그건 모두 나와 상관없어요. 아니요,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그건 대가를 치렀고 사라지고 잊혔어요. 그저 과거일 뿐이에요.
오랜만에 에디트 피아프의 샹송을 들으며 그 시절을 떠올려본다. 그래. 과거일 뿐이다. 이미 사라지고 잊힌 과거. 그리고 상관없지. 나에겐 나를 웃게 해 주는 여러 사람들이 있으니 말이야. 이젠 슬픈 감정을 혼자서 갖고 다니진 않아. 나에게는 이미 넘치는 유리잔이 있어. 그리고 나는 나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