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전교 5등 정도를 유지하던 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의 꿈은 서울대 경영학과였지만, 다른 컨설턴트들이 모두 다 한결같이 ‘서울대는 안된다’고 입을 모아 평가받는 생기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 학생의 생기부가 굉장히 독특했기 때문이었다. 그 생기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그리고 유일했던 특징은 학생부의 말미를 장식하고 있는 <독서활동상황>에 기록된 책이 너무나도 많았다는 점이다. 1학년 때 읽은 책이 70여권, 2학년 때도 60여권에 달했다. 3학년 1학기, 입시를 치르는 빠듯한 반년 간의 시간 속에서도 이 학생은 20권 정도의 책을 읽어치웠다. 3년 동안 150권이 넘어가는 숫자였다.
1학년 독서 기록에는 우리가 알법한 모든 고전문학이란 문학은 빼곡히 다 들어가 있었다. 마치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책 목록에는 여상스런 책 제목들이 많았다.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까지…. 물론 한국의 서점마다 높다랗게 쌓여있는 그때 그때의 베스트셀러 소설들도 껴 있었다. 보통 입시를 치르는 고등학생들은 책의 제목이 입시와 직결된다고 생각해서 본인이 희망하는 학과와 연관된 딱딱한 책들로 학생부를 가득 채운다. 하지만 이 친구는 그런 것쯤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던 것 같다. 거대한 하나의 ‘책 창고’스러운 독서목록을 가진 그 친구는 진정 책을 너무나도 사랑하던 학생이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 그 학생의 관심을 끈 책은 철학이었다. 2학년 윤리 시간에 롤스의 정의론에 대해 배우게 되자, 엄청나게 두꺼운, 심지어 나조차 대학원에 진학해서야 겨우 읽었던 그 책을 탐독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어떤 게 정의롭다라고 얘기를 하면서도 그게 왜 정의로운지에 대해서 답을 하기가 어려운데, 학생은 그 해답을 정의론 속에서 스스로 찾아 나갔다. 그 뒤로 철학과 인문학에 관심이 생긴 그 학생은 다음부터 이렇게 나한테 물었다. 이 다음에 어떤 책을 읽으면 되겠느냐고.
사실 나도 그쪽을 해박하게 아는 것은 아니었던지라, 철학의 기원인 고대 그리스의 철학부터 읽어 나갈것을 추천했다. 그러자 그 학생은 한국에 번역되어 있던 플라톤의 대화편을 싹 다 읽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물었다. 여기 있는 대화편이 플라톤이 쓴 전부인가요?
우리나라에서 번역된 플라톤의 대화편보다, 아직 번역이 안된 대화편이 더 많았다. 그리스어로 읽을 수는 없지만, 영어로 번역된 것은 해외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은 영문판 대화편을 구해서 모조리 다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철학과 인문학으로 관심을 넓힌 학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시학 등의 고전들을 섭렵해 나갔다. 1학년 때는 문학, 2학년 때는 철학과 인문학, 그리고 3학년 때에는 앨빈 토플러부터 시작한 사회과학 서적들을 읽었다.
내가 보기에도 대단해보였는데 학교에서도 당연히 책벌레라고 소문이 나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학생을 가장 아꼈던 분은 역시 당연하게도 학교 도서관의 사서 선생님이었다. 그 학생은 봉사활동도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며 보냈고, 동아리 활동도 당연히 친구들과 책을 읽는 동아리를 선택했다. 이런 학생의 생기부는 온통 책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다른 스펙이라고는 봉사상과 교내논술대회 장려상 정도만 있었다. 경영학과에 맞는 전공적합성은 그다지 찾아볼 수 없는 학생부였던 것이다.
전공적합성이 가장 드러날 수 있는 교과세부능력 특기사항, 줄여서 세특이라고 불리는 영역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수행평가에서 학생들은 자신이 진학하고자 하는 학과의 내용과 본인의 활동주제를 맞추기 마련이지만, 그 학생은 그냥 수업시간마다 주어진 활동에 충실했다. 예를 들어 사회문화 시간에도 경영학과 지원을 의식해서 다른 나라의 기업문화나 마케팅 등 경영학과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 속 내용을 조금 더 깊이 파고드는 식이었다. 다만 본인이 관심이 있는 주제가 있으면 다방면으로 그 주제를 공부하고자 했다. 국어시간에 찬기파랑가를 배우면 학자에 따른 번역과 해석의 차이를 찾아보고자 국내 논문들을 뒤졌다. 코카서스 인종의 문화와 관련해서 배우면 미국 의회 도서관까지 들어가서 책을 찾아 보고서를 쓰는 정도였다.
특별히 경영이라는 전공 적합성과 관련해서 열심히 공부한 건 아니고, 그때그때 배운 주제에 맞춰서 충실히, 또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이 학생부 기록상에도 매우 뚜렷하게 드러나있지는 않았다. 세특 내용을 기록하는 각 과목의 선생님에 따라서도 구체성에 차이가 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모든 컨설턴트들이 평가하기엔 ‘모자란 학생부’로 보일 법 했다. 강남에 위치하긴 했지만 자사고나 특목고 수준의 학교가 아닌 일반고등학교의 전교 5등 안팎인데다가, 수상성적도 특출난 것이 없었다. 훌륭한 학생임은 맞으나 서울대에 가기엔 부족해 보인다는 말이다. 그 학생이 가진 무기는 오로지 150권의 중구난방스러운 책 목록이었다.
하지만 나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지원하는 것을 적극 추천했다.
사실 그 학생의 엄마가 나를 찾아온 목적은 학생을 확실히 단념시키기 위해서였다. 서울대는 꼭 합격하고 싶은데, 낮은 과를 써야 그나마 가능성이 높을 것이기 때문에 비교적 경쟁이 낮은 과를 쓰도록 학생을 설득시키고자 했던 것이었다.
제가 봤을 때는 써도 될 것 같습니다, 저라면 뽑아줄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하자 엄마와 학생의 두 눈이 모두 동그래졌다. 엄마와 달리 학생은 반가움에 눈이 반짝였다. 아이는 다른 곳에서는 모두 다 안된다고 하는데, 왜 나만 된다고 하는지 바로 물었다.
내가 만약 입학 사정관이라면 이 학생을 눈 앞에 데려다놓고 한번 보고싶어할 것 같았다. 그 이유만으로도 사실 충분했다.
난 그 학생의 학생부를 가지고 눈 앞에서 점수를 매기며 서류평가를 해 보았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가려면 최소 15점의 점수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학생의 점수는 12점에서 13점정도의 결과가 나왔다. 12.5점이면 서울대의 아주 낮은 학과를 써야 그나마 붙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입사관들이 최종적으로 조정점수를 줘서 이 학생을 면접장까지 오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왜 이렇게 주관적으로 이야기를 하냐며 불만스럽게 이야기했다.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이야기해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냉정하게 보더라도 이 학생을 마다할 학과는 서울대에 없어 보였다. 어떤 학과를 지원하더라도 일단 1단계는 다 합격을 할 것이었다. 다만 면접 준비는 열심히 해야 했다. 경영대의 경우 수학 면접이 있었다. 학생은 아까부터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자신있다면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때부터 엄마는 학생을 차마 이기지 못했고, 그 학생은 결국 본인의 의지대로 경영학과에 지원하기로 했다.
그 학생이 자기소개서의 문항을 준비할 때도, 무엇을 써야될까 고민하길래 당연히 책 이야기를 하라고 조언해주었다. 그래서 1번 문항은 왜 고전문학에 빠져 살았는지, 그리고 2학년 때 왜 인문학과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마지막으로 그 관심이 왜 사회과학으로 옮겨간 것인지에 대한 3년간의 독서 일대기가 쓰여졌다. 그 학생의 자기소개서는 누가 읽어도 이 학생 인생의 모든 순간은 책이 전부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책에 대한 절절한 러브레터에 가까웠다.
그 당시에 서울대학교가 받는 서류는 자기소개서 말고도 하나 더 있었다. 교사의 추천서였다. 이쯤되면 그 추천서를 누가 써 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과 가장 가까울 수 밖에 없는 고등학교 도서관의 사서 선생님이었다. 사서 선생님은 그 학생을 ‘늘 책을 짊어지고 사는 아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그렇게 자기소개서와 추천서에는 마케팅이나 수학, 경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책의 이야기가 서재처럼 빼곡히 차 있었다. 그리고 학생은 1단계와 면접을 거쳐 최종 합격했다. 결국 150권의 책과 함께 서울대 경영학과의 높은 문턱을 넘은 것이다.
요즘 고등학교 학생들은 전공과 관련된 책을 골라 최소한으로, 효율적인 독서를 하려고 한다. 책을 읽지 않고도 인터넷이나 유튜브를 통해 얻은 줄거리로 대충 독서목록을 꾸리고는 한다. 그마저도 이제 독서기록을 대학들이 확인하지 못하게 되어, 학기 중에 책을 읽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
책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중인지를 진실되게 보여주어야 하지만, 전공적합성이라는 허울에 빠져 학생부를 그저 ‘관리’하면서 지낼 뿐이다.
이 책벌레 학생은 책을 통해 본인이 누구인지 증명해내었다. 그리고 아마도 서울대에 진학해서도 책을 읽어나가며 자신의 세계를 꾸려나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때도, 지금도 그 학생이야말로 서울대가 뽑아야 하는 가장 인재다운 인재였음을 틀림없이 확신할 수 있다.
서울대는 과연 최고의 학생들을 선발하는 곳일까? 나는 서울대의 학종 평가기준을 대단히 좋은 기준이라고 평가하지는 않는다. 학생의 모든 면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이 학생부종합전형의 취지와 목표이기는 하지만, 좁은 기준과 틀 안에 담을 수 없는 학생들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 학생의 합격 순간을 바라보면서, 서울대가 그래도 제대로 된 학생을 걸러서 뽑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는 굴러가는 곳이구나를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