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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우 Sep 15. 2022

삶에서 일기를 잃어버리면 생기는 일

아무튼 남의 일기는 절대 읽지 마세요

8살 숙제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이래,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생이 되어서까지 나에게 변함없는 종교가 있었다면, 그건 바로 종이와 펜이었다. 가장 괴로운 일도, 가장 행복한 경험도, 친구와 마음이 상했던 일도, 남자 친구와의 달콤한 첫 키스도 모두 일기장에 담겼다. 


어딜 가더라도 노트와 펜을 챙겨 다니는 습관이 들었고, 혹시라도 가방을 바꿔 들었거나 예상치 않게 약속이 취소되어 시간이 붕 뜨는 날에는 커피숍 카운터에서 볼펜을 빌려서 냅킨에라도 썼다. 여름은 끝날 줄 모르게 덥고 나는 카페에 들어와 아이스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햇볕은 쨍하고 현기증이 일 정도로 더운 날이다, 그런 감상과 그 순간의 나를 습관처럼 냅킨 위로 옮겨놓았다. 그런 냅킨이 지금도 일기장 사이에 여러 장 끼워져 있다. 





우울이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을 무렵 정신과나 카운슬러 전에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새로운 일기장이었다. 이 무겁고 진득한 슬픔이 어디에서부터 오는 건지, 그걸 파헤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도구가 펜과 노트라는 직감이 있었다. 문구점에 가서 하얀 바탕에 파스텔 톤 수채 물감이 흩뿌려진 표지의 노트를 한 권 샀다. 하드커버에 3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노트였다. 우울의 뿌리를 찾아 내려가는데 얇은 노트로는 어림도 없다는 걸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그날부터 아이가 낮잠을 자거나 남편이 회식으로 늦어 혼자가 되면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불쑥 튀어나오기도 했고 그저 아이 유모차를 끌고 도서관까지 가는 길의 따사로운 햇볕이 얼마나 감동스러웠는지를 늘어놓기도 했다. 나의 삶은 왜 이렇게 허공을 딛는 듯 붕 떠있는 느낌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답이 없어 그저 점을 여러 개 찍고 비워둔 공백도 있었다. 


우울이 일상과 함께 한다는 것은 그 시기의 일기를 읽으면 느낄 수 있다. 그 당시 한창 유행이었던 스텐 프라이팬을 새로 장만하고서 가장 중요한 게 예열이라는 것을 터득했다. 예열이 되었는지 확인하려면 재료를 올리기 전에 손가락에 물을 묻혀 프라이팬 위에 털어낸다. 충분히 예열이 되었다면 물방울이 퍼지지 않고 표면에 동그랗게 구슬처럼 맺혀 도르르르 구른다. 그 물방울들은 팬 위를 매끄럽게 구르다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파스스 하고 증발한다. 그 가스레인지 앞에 한참 서 있었던 날에, “나도 저렇게 파스스-하고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고스란히 증발해버리면 좋겠다” 하고 썼다. 그 마음이 얼마나 강렬하고 간절했던지, 나는 지금도 스텐 프라이팬을 예열하다가 문득문득 그 단어들을 써 내려간 순간을 떠올린다. 





첫 몇십 페이지가 일상과 트라우마를 오가는 글들로 채워지던 무렵의 어느 저녁에 부부싸움을 했다. 그에게 나는 항상 지나치게 쉽게 상처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잘못한 것이 없는 보통 사람일 뿐인데 나의 예민함과 과민함이 모두를 힘들게 한다고 했다. 한창 말다툼을 하던 그가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목소리가 관대하게 바뀐다. “그래, 당신이 상처가 많은 사람이라는 거 나도 알아. 그리고 이런 사소한 일로 상처받는 게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상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어릴 때 아버지한테 받은 상처도 많은 것 같던데. 당신이 쓴 일기를 읽다가 내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라. 게다가 더 어렸을 때는 세상에, 그 사람은 대체 뭣 때문에...” 


그의 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순간 나의 세계가 멈추었다. 똑딱거리고 가던 시계에서 건전지가 갑자기 빠진 것처럼 사고가 정지했다. 제일 먼저 나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내 일기를 읽었다는 거야? 하고 되물었다. 내가 얼빠진 사람처럼 충격을 받은 것을 보고 그는 자신의 평소 레퍼토리를 반복했다. 우리는 부부 사이니까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런 걸 가지고 뭘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굴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그렇게 싫으면 앞으로는 안 읽으면 되는 거 아냐. 


“당신이 쓴 일기를 읽다가"에서 정지한 나의 세계는 “그럴 수도 있는 거지"에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날부터는 더 이상 일기를 쓸 수 없었다. 나 자신을 꺼내어 종이 위에 올려놓는 것이 더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 단번에 아무것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때까지 썼던 페이지들을 북북 뜯어내 버리고 모든 것을 나의 탓으로 돌렸다. 일기장을 책장에 꽂아둔 것도 나의 잘못, 일기를 솔직하게 쓴 것도 나의 잘못, 애초에 일기를 쓰겠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나의 잘못이었다. 가장 연약하고 여린 부분의 가장자리로 조심스럽게 쌓아 올리던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은 한순간이었고, 그 세계에 다시 발을 딛는 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을 시작하고, 이직을 하고, 직장인이라는 페르소나가 어느 정도 견고해졌을 무렵에야 아주 조심스럽게 다시 일기장을 살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는 일기장을 나의 분신처럼 다루었다. 주로 출퇴근용 가방 한 구석에 가지고 다니며 틈날 때마다 아주 조금씩 썼고, 주말에 가지고 다니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집을 나서기 전에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공간에 꽁꽁 제대로 숨겨 두었다. 무슨 007 작전이라도 하듯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은 애초에 닿을 일이 없게 단단히 챙겼다. 다시 시작한 일기장 한 권을 채우는 데는 3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자주 쓰지도, 길게 쓰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 몇 년의 시간 동안 나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었고, 잃어버린 마음의 근육을 되찾는 것에는 인내심과 꾸준함이 필요하다는 것도 배웠다. 





이혼의 과정이 마무리되고 나서 혼자 있는 주간에 일기장을 책상 위에 올려두는 것이 얼마나 어색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글은 나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손이 멈추지 않아서, 이혼 직후 400페이지짜리 몰스킨 노트 한 권을 채우는 데 3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새로운 일기장을 구입하면서 문득 생각했다. 그가 나의 일기를 읽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게 아닐까. 하지만 이 경우에 일기는 그저 메타포의 하나일 뿐이고, 우리는 어쨌든 이 지점에 와 있다. 삶은 결국 그런 거지, 하고 새로운 일기장에 적어 넣는다. 


예상치 못하게 오래전에 받은 그 상처를 다독일 수 있었던 것은 올해 초에 푹 빠져 있었던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을 읽다가였다. ‘비가 오나 해가 뜨나'라는 아주 짧은 단편집이었는데, 나는 어느 대목을 읽다가 깜짝 놀라 자세를 고쳐 앉고 그 페이지를 사진으로 찍어두었다. 이럴 수가, 내가 분명하게 느낀 것을 다른 누군가가 종이 위의 활자로 옮겨 두었다니. 스스로를 무시하고 자신을 탓하며 무작정 넣어두었던 내 마음을 이야기 안의 누군가가 선뜻 멋지고 간결한 단어로 얘기해주면 그제야 그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럴 때는 앞 뒤 콘텍스트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그 텍스트 자체가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준다…라고 하기에 아래의 내용은 대중에게 공유하기에는 조금 적절하지 않은가, 하고 고민이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간단히 요약하자면: 


[아내가 요리를 하는 동안 남편은 부엌 카운터에 앉아 별생각 없이 아내의 노트를 뒤적인다. 그런 남편을 보던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주방용 밀대를 들이밀며 당신 거기를 톱으로 썰어버릴 거라고 한다 ("she told me she would saw my balls off"). 그가 주방용 밀대로 그러기는 좀 어려울걸, 하고 맞받아치자 그녀는 밀대는 그걸 잘라낸 다음에 쓰는 용도라고 대꾸한다…...] 


결국 책 후반부에는 반전이 있고 그 얘기가 그 얘기가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나지만, 아무튼 이 대목을 읽으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마음의 안식처가 되고 피난처가 되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일기를 되찾은 것에 매일 감사를 올리며... 아무튼 남의 일기는 절대 읽지 말아요, 우리. 


 “내 일기를 읽으면 당신 거기를 톱으로 썰어버릴 거야" 하고 말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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