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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우 Sep 08. 2022

30년째, 일기를 씁니다

일기에 대한 단상 1

태어나서 처음으로 일기라는 것을 쓴 날을 여태 기억하고 있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처음으로 숙제라는 걸 받아온 나는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으로 돌아와 거실의 낮은 상에 일기 공책을 펼쳐놓는다. 손잡이를 돌돌 돌려 연필을 뾰족하게 깎고 자리를 잡고 앉는다. 날짜를 쓰고, 요일을 적어 넣고, 그날의 날씨를 골라 동그라미를 친다. 해가 떴지만 흐리기도 했는데, 하고 잠깐 멈추어 생각한다. 첫 번째 쓴 일기 공책은 한 권이 대부분 그 첫 일기와 같은 내용이다.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학교에 갔다. 집으로 돌아와 숙제를 하고 저녁을 먹고 잠을 잤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게 그 당시 여덟 살 나라는 존재의 매일매일이었다. 먹고, 자고, 학교에 가고, 그 밖에 대단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얼마나 좋은 일상인가 싶을 정도로.


그 첫 주를 시작으로 6학년 졸업할 때까지 나는 숙제로 일기를 쓰고 선생님에게 검사를 받았다. ‘참 잘했어요' 도장은 3학년 때까지 받았고, 4학년이 되면서 더 작은 줄이 쳐진 고학년 공책으로 바뀌었고 선생님들은 일기를 읽고 간단한 감상평 적어주었다. 예를 들면 “부모님에게 칭찬을 받다니 정말 자랑스러웠겠구나!” 라던지, “그래, 스스로 하는 것의 중요함을 느끼다니 선생님은 네가 자랑스럽다"라는 식이었다. 6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은 숙제 검사하면서 선생님이 읽지 않았으면 하는 날의 일기는 페이지를 반으로 접어두면 정말로 읽지 않고 돌려줄 테니 대충 쓰지 말고 진짜 하고 싶은 얘기를 쓰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나처럼 일기를 평생 써온 지인과 이야기를 하다가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 일기 검사하는 거, 너무 비인간적인 처사 아냐?” 하는 분개 섞인 불평을 들었다. 그렇지, 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이니까 그걸 숙제로 적어내고 선생님의 평가를 들어야 한다는 것은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과정을 통해 내 손가락과 마음의 근육을 키울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근육을 일찌감치 키우고 일기를 진지하게 쓰는 법을 배워서 지금 브런치에도 글을 쓸 수 있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일기 숙제에 관대해져 버린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일기를 쓰면서 자연스럽게 종이 위에 무언가를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 일어나서 학교 다녀와서 잠을 잤다는 두 줄로 시작한 일기는, 조금씩 길어졌고 진지해졌다. 수십 권의 일기장이 채워지고 셀 수 없는 ‘참 잘했어요’와 ‘조금 더 열심히' 도장을 받으면서 나는 진지하고 솔직하게 일기를 썼다. 형제가 많은 집안에서 자라나는 과정, 칭찬을 받아 기쁜 일, 별 것 아닌 일상, 가족에게 느끼는 불만. 삐뚤빼뚤한 단어들 사이로 나의 성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다는 4학년 때의 일기를 읽을 때는, 나라는 인간은 저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일관적인가 하고 조금 감탄을  정도다.


단순한 일상이라도 그걸 종이 위로 옮기는 순간 형체가 생긴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삶이 혼란스럽고 가족들에게는 불만스러운 사춘기 소녀의 투정 섞인 불평조차도, 그게 문장의 형태로 종이 위에 내려앉는 순간 실체가 생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손에 잡히고 눈에 읽히는 것이 되는 순간, 나라는 존재도 함께 유효해진다.


어릴 때 쓴 수십 권의 일기 중 몇 권은 여태 남아있다. 그중에서도 열 살 이전에 쓴 일기는 항상 소중하게 간직한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가끔 팡! 하고 터지는 감정들을 읽는 즐거움이 있다. 어린이날 선물을 받은 날은 태어나서 최고로 행복하다고 했고, 운동회를 했는데 김밥을 먹다가 체해서 손가락을 땄는데 정말 많이 울었다고 했다. 8살 작가로서의 내 목소리를 고스란히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특별한 일이다. 무엇보다, 아직 마음을 크게 다치기 이전 자신의 모습이 손에 잡히는 유형의 무엇으로 눈앞에 존재한다는 것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종류의 선물이다.


이번 주에 그림을 그리며 ‘그림은 생각보다 재미있네' 하고 생각했는데, 브런치에 글을 올리느라 8살 일기를 뒤적이다가 이걸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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