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콥스키는 1877년 겨울부터 이탈리아, 스위스의 여러 도시들을 여행했는데 스위스 제네바 호수 연안에 머물던 중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했습니다. 이 곡은 차이콥스키가 작곡한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입니다.
차이콥스키는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레오폴드 아우어에게 첫 연주를 부탁하며 이 작품을 헌정하려 했는데 하지만 아우어는 이 곡은 연주 불가능하다며 연주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곡은 아돌프 브로드스키(Adolph Brodsky)에 의해 1881년 12월 4일 빈에서 처음 연주되었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은 초연 때 그리 호평을 받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유명했던 음악 비평가 한슬리크는 “음악에서 악취가 난다”며 아주 심한 혹평을 했습니다.
이 곡은 다시 연주되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몇 개월 후 브로드스키가 이 곡을 다시 연주하자 사람들은 이 곡을 매우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차이콥스키는 이 곡을 아우어가 아닌 브로드스키에게 다시 헌정했습니다.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도 난이도가 높다고 연주를 거부당했습니다. 그렇지만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도 바이올린 협주곡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바이올린 협주곡처럼 자주 연주되고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곡이 되었습니다.
고흐 같은 화가도 시대를 앞서가서인지 인정받지 못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고흐는 평생 그림을 거의 팔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작품들은 그 예술성을 인정받고 지금까지도 너무 사랑받고 있습니다. 살아가며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고 힘든 일이 있어도 상황이 바뀔 수 있습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 힘을 내면 좋겠습니다.
예후디 메뉴인은 12살 때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베토벤 협주곡을 협연하고 천재로 이름을 날리고 세계 각국을 순회 공연했습니다. 오이스트라흐, 하이페츠가 유명했지만 예후디 메뉴인은 깊은 감성을 표현하는 자신만의 해석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신동들을 후원 양성했고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꺼리던 현대 작곡가들의 레파토리를 연주하고 제3세계 음악가들과 교류를 했습니다. 지금은 크로스오버가 익숙해졌지만 그 당시로는 파격적인 시도를 많이 했습니다. 인류를 위한 일들을 하고 싶어했고 정의실현을 위해 힘썼던 음악가입니다.
그는 고통 받는 마음들을 연주로 치유해 주고 싶었다 합니다. 천재로 이름을 알렸던 메뉴인은 모든 일이 순탄하게 흘러갈 줄 알았지만, 성인이 된 메뉴인의 연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고, 그는 사람들의 말에 상처받을 때도 자주 있었습니다. 그도 사람인지라 여러 번 연주하다 보면 만족스러울 때도 있고 조금 덜 만족스러울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연주를 잘 못 해서 사람들이 연주에 대해 안 좋은 평가를 하고 마음이 힘든 날에도 스스로에게 수고했다고 위로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메뉴인은 연주자의 마인드 컨트롤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실은 모든 일에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합니다. 결국 메뉴인은 그의 깊이 있는 음악성과 음악 해석 때문에 오이스트라흐처럼 바이올린의 거장으로 기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