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신뢰, 형식으로만 남은 국제 협약
국제 사회에서 협약과 조약을 통해 질서를 유지하려 한 역사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조약은 유럽에서 벌어진 30년간의 종교전쟁을 종식했고, 근대 국제 관계의 기틀을 마련하여 각 국가 간의 주권 존중을 강요한 평화조약으로, 정치학적으로는 근대적인 국제 협약과 국제법이 최초로 제정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 본격적인 국제 협약 체계가 자리 잡은 것은 20세기 이후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19년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과 국제연맹 창설은 전쟁을 방지하려는 국제적인 첫 번째 시도였으나,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이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수천만 명의 사상자와 난민을 양산한 제2차 세계대전은 현대전이 불러올 수 있는 참혹성을 국제사회에 각인시켰고, 이는 1945년 UN의 창설과 1949년 제네바 협약 개정을 통해 전시 인권 보장을 강화하는 등 보다 강력한 국제 규범을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에 맺어진 헬싱키 협정은 전쟁 후에 벌어진 유럽 지역의 냉전을 종결짓는 시발점이 되었고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의 설립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 여러 국가 간의 협약과 조약들이 이루어졌다. 1994년 부다페스트 양해각서에서 우크라이나가 핵을 포기하는 대가로 영토 보전을 약속받았고, 1993년과 1995년의 오슬로 협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적 협약들은 시간이 지나며 점차 무력해졌다.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 병합과 2022년 우크라이나 전면전으로 인해 사실상 깨졌고, 국제사회는 이를 제재하지 못했다. 오슬로 협정 역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을 막지 못하였고, 두 국가의 충돌은 현재까지도 진행형이다. 2000년대 후반부터 세계 경제를 이끌었던 미·중 관계는 자유무역을 명분으로 한 세계무역기구(WTO)의 협약에 따라 잘 유지되는 듯했으나, 중국의 급격한 성장과 미국 중산층의 붕괴로 인해 양국은 규정을 무시하며 경제적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런 여러 가지 모습들은 각국의 이익 추구 앞에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국제 규범의 나약함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이러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마주 보고 있는 인물은 서로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맺는 듯하지만, 실상 그들의 새끼손가락은 잘려 나간 상태다. 신뢰와 약속을 의미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가 이미 사라진 상태에서, 그들은 여전히 형식적으로만 약속을 하고 있다. 단절된 손가락은 의미 없는 조약과 협약, 신뢰를 잃어버린 국제 관계를 나타낸다.
전후 국제 질서를 유지해 온 원칙들은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고, 국가 간의 약속은 실질적 의미를 배제한 채 그 형식만 남겨놓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조약과 협정이 국제 사회를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믿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힘의 논리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 이러한 냉혹한 국제 관계 속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믿어야 할까? 국가 간의 협약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다 벌어진 참사들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 문제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