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칸의 주관적인 높이에 대하여

부엌을 여행하는 시크한 여자의 살림에 대한 단상

by 정원

“냉장고 칸은 왜 이렇게 만들어져 있는 거야?”

답을 바라지 않는 이런 질문은 어떤 톤으로 말을 해도 신경질적으로 들리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과잉 신경 반응의 이면 세계는 대체로 누구에게도 납득 가능하게 설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할수록 수렁으로 빠지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은 너무나 유치한 내면의 이야기이거나 타인에 대한 근거 부족한 배타심 혹은 순간적으로 밀려 올라오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패배의식 등이 빚어낸 이야기일 때가 많다.

쉽게 말하자면 청소년기, 누구나 다 인정하는 질풍 노도의 시기에 “아, 짜증나!”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이해받고자 했던 그런 상황이다.

하지만 그런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갔다. 괜히 짜증난다고 화를 내는 것은 이제는 돌발 행동, 미성숙한 처사, 매너 없음으로 정리된다. 타당하지 않은 인정과 이해가 쉽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가장 잘 안다.

그래서 터득한 것은 ‘돌려 말하기’다. 시트콤 드라마의 시즌이 끝날 즈음마다 어김없이 찾아드는 그 여전한 사춘기를 들키지 않으려고 익힌 비상한 재주.

정말로 내 마음 들키지 않았을까?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대답은 ‘아니오’다.

나 역시 그러하다. 늘 들킨다.


어느 날 부엌에 서 있던 나는 하루 중 부엌에 머무는 시간이 꽤 길다는 것을 인식함과 동시에 식탁이며 조리대며 감당할 수 없게 너무 많은 그릇들이 나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일은 사실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심각하게 깨달아야만 인식 가능하다) 하고 싶은 다른 일들이 많았고, 쓰고 싶은 글들이 밀려 있었고, 읽고 싶은 책들은 책상 위에 쌓여서 나는 독자가 아닌 책 수집가일 뿐인지 오래 되었다.

동생이 집안일을 좀 돕겠노라 집에 왔는데, 부엌에서 우리는 자꾸 엉덩이를 부딪히고 있었다. 우리 둘이 서성이기에 부엌은 좁지도 않았지만 그날 따라 내 마음이 조급해져 있었기 때문이리라.

늦은 아침식사 뒤 빈 그릇들이 여전히 식탁에 널브러져 있었고, 동생이 와서야 겨우 반찬통 따위를 정리해서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내가 3단으로 쌓은 반찬통 세 개가 한 칸에 들어가지 않는다. 열린 냉장고 앞에서 투덜거린다.

“대체 냉장고 칸은 왜 이렇게 반찬통 두 개를 올리기에는 너무 남고, 세 개를 올리기에는 좀 부족한 거지?”

그러자 동생이 대꾸한다.

“그러니까 냉장고 전용 용기 있잖아.”

나보다 동생이 더 신경질이 나 있거나 우회적으로 정신 차리라고 하는 말일 것이다. 전자는 나 스스로 자위하는 말이고, 후자는 좀 더 객관화된 말이다. 모질지 못한 동생의 화법이다.


나는 괜한 냉장고에 대고 화풀이하듯 돌려 말했지만, 동생은 알아차렸고, 나는 들켰다.

들킨 이유는 간단하다. 냉장고 칸은 높지도 낮지도 않고 그냥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 때문이다. 모든 사물이 제자리에 있는 듯,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듯 아무 문제 없을 때 냉장고 칸의 높이는 지극히 정상적이다. 그럴 때 나는 이유 없이 냉장고에 시비를 걸 일이 없다. 그냥 그대로인 냉장고에 시비를 걸게 되는 것은 내가 복잡해져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제 온도를 찾지 못할 때다. 쉽사리 냉각되었다가 쉽사리 뜨거워지며 고장 난 냉장고마냥 나라는 사람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아플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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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에 방영되었던 텔레비전 드라마 <연애시대>는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다. 그 드라마는 꽤 흥행한 작품이라 이른바 명장면이라 이름 붙일 만한 것들이 꽤 많을 것이다. 나에게도 <연애시대>의 명장면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혹시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나에게는 이따금 마음이 꼭꼭 엉켜 있을 때나 체증이 내려가지 못하는 듯 속이 답답할 때 떠올리면 어느 새 위로가 되고는 하는 장면이다.

어느 날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여주인공 은호(손예진 분)가 매우 마음이 답답하던 날 집에 돌아와 냉장고 문을 열고 피클이 담긴 유리병을 꺼내어 뚜껑을 열려고 하는데 그게 잘 열리지 않는다. 누가 닫아 놓은 것도 아니고 자신이 닫아 두었을 텐데, 그것은 꼭꼭 잠긴 거것처럼 군다. 아무리 힘을 쓰고 요령을 부려 보아도 열리지 않자, 급기야 화가 폭발하고 은호는 병째 내던지고 만다.

이때 은호의 유리병은 내게 있어 종종 그러고는 하는 냉장고 칸의 높이다.

내가 괜찮아야 유리병도 냉장고도 식탁도 그릇들도 다 온전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냉장고가 아무 것도 들어갈 수 없을 듯 꽉꽉 차 있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냉장고 칸이 너무 답답해 보이는 것은 내가 지금 괜찮지 않다는 혼자만의 대화.



그러니 냉장고 문을 열기 전에는 마음부터 활짝 열고 손잡이를 잡자. 그렇게 하지 않으면, 괜히 냉장고를 뒤집거나 가스렌지 후드를 청소하거나 찬장 속에서 전설이 된 그릇 등을 꺼내는 등 내키지 않았던 일들로 오늘의 일과를 망칠 수 있다.(그런 일들은 내키는 때에 즐겁게 해야 한다)

우리 집 부엌 한쪽에 거울처럼 냉장고가 서 있다. 가스렌지도 누워 있고 도마도 누워 있고 그릇들도 다 얌전히 웅크리고 있는데 왜 냉장고만 서 있나 했더니, 언제고 내 모습 잘 비추어 보라고 그렇게 우뚝 서 있나 보다. 거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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