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아름다운 마을에서 - 치킨아도보

부엌을 여행하는 시크한 여자의 살림에 대한 단상

by 정원

아침에 눈 뜨자마자 마음이 분주하다.

마을공동체 총회가 있는 날이다.

이 마을에서 4년째. 나는 영주산마을공동체 조합원이다. 이곳에 살면서부터 지금까지 쭉.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그것이 바뀌지 않는 사실이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지 않으면 긴가민가 얼버무릴 수 있는 이유와 조건들이 백 개도 넘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심플하게 나는 영주산마을공동체 조합원이기로 한다. 잘하든 못하든. 그건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 가운데 하나니까.



하지만 난 평소 그걸 잘 티 내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많은 일들로 분주해 성격 활달하고 적극적인 사람 같지만 사실은 마음이 들쭉날쭉한 타입이다. 그래서 타인들과 관계 맺기에 제법 조심스럽다 보니 마음 드러내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좋아진 것들 좋아진 사람 앞에서 조용해진다. 사람들 만나는 일에 있어서만은 만년 사춘기 아이 같은 이 어리숙함은, 고백하기에는 참 낯부끄럽다. 초등학교 시절 새 학기가 시작되면, 낯선 아이가 옆에 있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전날 밤부터 가슴이 콩닥콩닥 뛰다가 이불을 머리 위까지 뒤집어써야만 잠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그런 증세가 이 나이에도 여전하다.

그러니까 나에게 무슨 단체, 어떤 사회, 게다가 이런 조합이라는 건 쉽지 않은 대상인 거다. 아주 오래전부터 변함없이.


그런데 사람이 왜 이럴까. 쭈뼛쭈뼛 들쭉날쭉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타입이면서 자꾸 무엇이 좋아지기는 한다. 잘 표현하지 못하겠는데, 속으로는 이미 깊어진 지 오래다. 그런 내 마음을 누가 몰라주면 속상해지기까지 한다.(주변인들이여, 신경 쓸 것 없다. 어차피 혼자만 그러다 마니까)

마을은 지금 나에게 그런 대상이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 나에게 그런 대상들이다. 이제 막 혼자서 마음 주고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위로받고 혼자서 상처받기도 하고... 그렇지만 혼자서는 절대로 끝내지 못할 사람, 사랑 같다.


그런 사람들이 다 모이는 마을 총회라니, 설레었을 거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는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 치킨아도보라는 음식 한 냄비.



마을 총회를 앞두고 밴드에는 공지가 떴다. 닭 15킬로그램을 준비할 테니 마을 요리사들의 지원을 받겠다는 공지였다. 댓글들이 달린다. 어떤 이는 윙 2킬로그램, 어떤 이는 봉 2킬로그램, 요리가 여의치 않은 이들은 반찬으로 대신하고, 그것도 쉽지 않은 이들은 따뜻한 손과 뜨거운 마음과 빈 그릇만.

소통할 수 있는 많은 수단들이 넘쳐나는 이 세계에서 몰래 숨어보기 대장인 나는 잠시 미쳤었나 보다. 한밤중에 그 공지와 댓글들을 보다가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방에 있던 남편을 향해 “당신도 해 볼래요?” 소리치고는 거의 동시에 댓글을 단다. ‘봉 2개요.’

그러고는 내내 설레었던 것 같다. 당신도 해 보겠느냐고 물었지만, 사실은 내 마음이 그랬던 거다. 총회가 있는 날 아침, 사우나 가겠다는 남편을 다그쳐서 구하기 쉽지 않은 재료를 사 오게 하고, 계량하게 하는 등 손을 빌렸지만 사실은 다 내 마음이 그랬던 거다.

그렇게 준비한, 남편과 나의 요리, 치킨아도보.


스페인이 통치했던 필리핀, 멕시코, 페루 등지에서 먹는, 우리나라로 치면 지역마다 조리법 다양한 돼지갈비나 불고기 같은 가정식 요리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치킨아도보는 나라마다 지역마다 집집마다 수천수만 가지 레시피를 가진 요리다.

오늘은 우리 집만의 레시피(아, 남편이 정확하게 계량했을 리 없기 때문에 오늘의 레시피는 없는 걸로 해야 할지 모르겠다)로, 대한민국 경기도 고양시의 한 마을에서 열린 잔치 열 개도 넘는 닭 요리들 가운데 치킨아도보 냄비를 놓았다.



집집마다 조리법도 양념도 다 다른 여러 빛깔의 닭 요리들이 그 집 주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 귀에 대고 소곤거리는 것만 같았는데…….

혹시 다른 사람들도 들었는지 모르겠다. 우리 집 냄비에서 들리는 소리를.

몹시 쑥스럽지만 내 마음이 무척 설레었고, 이렇게 여러분을 위해 아침부터 음식을 준비할 수 있어서 기뻤다고……, 그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다.


잔치 내내 마을 사람들이 하나같이 말한다.

“맛있어요!”

“한 달에 한 번씩 하면 좋겠어요!”

“이렇게 다양할 수가요!”


평범한 문장들이 밑줄 그어진 볼드체를 읽을 때처럼 들려올 때가 있다.
진심이 담겨 있을 때,
서로의 사랑이 교류할 때,
눈치 보지 않고 순식간에 나온 말일 때.

오늘 같이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나눈 대화들이 그러했다.


‘정말로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나는 누군가 축복받은 마을에 살고 있다고 한다면 역시 시크하게 과장되기 쉬운 말이라고 제지할 게 빤하지만, 오늘은 잠시 눈 질끈 감고 말에 있어 사치를 부려 보고 싶다.

나는 ‘그래도 아름다운 마을’에 살고 있는, 행복한 사람이다.


- 이따금 타인들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들끓는 부엌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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