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을 여행하는 시크한 여자의 살림에 대한 단상
우리 집 찬장에는 흰 설탕이 구비되어 있다.
흰 설탕은 몸에 나쁘다고들 한다. 그렇지만 사실 흰 설탕이나 황설탕은 둘 다 정제 과정을 거친 설탕으로 영양 성분도 비슷하고 칼로리도 비슷하다.
정제 과정 자체가 나쁘다고 판단했을 때는 비정제 원당을 사용하면 되고, 또 이 원당 자체의 품질을 따져서 유기농으로 재배된 사탕수수가 원료인지 그렇지 않은지 등등을 따지면 더 명확하게 취향에 맞는 설탕을 찾아 사용할 수 있다.
나는 음식을 하거나 빵을 만들 때 유기농원당이나 유기농 황설탕을 적절히 사용하는 편인데, 어디까지나 기분에 따라서 손에 잡히는 대로다. 설탕을 줄이면 좋은 건 명확히 알겠는데, 설탕을 쓸 때는 이걸 쓰든 저걸 쓰든 별다를 게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도 괜히 흰 설탕은 잘 쓰지 않게 된다. 설탕 종류도 다양하다 보니, 굳이 사람들이 꺼리는 흰 설탕에는 손이 잘 가지 않는 것이리라. 반드시 쓰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손이 잘 안 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반드시 흰 설탕을 써야 할 때가 있다. 정확하게는 쓰고 싶을 때이겠다. 이때는 유기농이고 뭐고 따질 것이 없다.
여름날 오이냉채를 만들 때, 시어머니께서 알려주신 오이냉채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서 해야 하니 반드시 흰 설탕을 쓴다. 얼음 동동 띄우면 햇살 받아 투명하게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오이냉채에는 당연히 흰 설탕이다.
케이크에 올릴 새하얀 눈 같은 생크림을 만들 때, 꼭 흰 설탕을 쓴다. 생크림이 누런 빛깔을 띠는 건 너무 이상할 테니까.
무와 감자를 적당히 깔고 그 위에 갈치와 갖은 채소들을 얹어 조림을 만들 때, 그때도 흰 설탕을 쓴다. 이건 괜히 그러는 건데, 아주 오래전에 남편과 남대문 시장 어느 가게에서 먹었던 갈치조림에 흰 설탕이 들어갔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우리 집 찬장에는 약간이나마 흰 설탕이 떨어지지 않는다.
몸에 나쁘다지만 흰 설탕이 주는 즐거움을 절대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뜨거운 여름 우리가 함께 추억하는 오이냉채를 만들어 냉동실에 넣어두었다가 차갑게 한 술 뜰 때, 아이들이 새하얀 생크림을 코에 묻히며 애니메이션에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천진한 소리로 깔깔거릴 때, 규격화된 고추장 양념의 ‘바로 그 맛’이 담긴 생선조림에서 시골밥상의 정겨움이 느껴질 때, 그럴 때 맛보게 되는 기쁨에는 왠지 이 흰 설탕이 한몫 단단히 하는 것만 같다.
누가 뭐라 해도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 이런 식으로 흰 설탕 사용을 합리화하느냐고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믿는다. ‘적당한 중독’은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 불가결의 성분이라고. ‘적당한 중독’이라는 말이 애초에 성립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끊기 어려운 것들이 없는 삶에 대하여 담백하다고 찬사만을 보낼 수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달고 짜고 맵고 시고 쓰다. 삶이 그러한데, 우리는 유난히 달달하기만 한 것들에 대하여 배타적이지 않나.
누군가 지금 달달해야만 하는 명확한 이유를 말한다면, 잠시 그 달콤함을 함께 음미해 주자. 조절해야 하는 설탕의 양보다 중요한 것이 얼마나 많은가.
어린 시절 버스 한 대가 지나가면 모래바람이 일고는 하던 신작로의 구멍가게에서 사 먹던 십 원짜리 눈깔사탕, 아무리 싫다고 해도 코를 부여잡고 들이켜야만 했던-엄마가 다려 준 한약, 하루하루 괴롭고 슬프지 않은 날이 없었던 젊은 날 호기롭게 기울이던 소주, 이제는 완전히 면역체계가 생겨 빈속에 마셔도 아무렇지 않은 커피 또 커피.
이 모든 것들에 야무지게 숨어 있는 단맛을 내가 물리칠 이유가 없다.
인생의 쓴맛이 풍성한 작금, 다정하게 단맛이나 나누다가 같이 낮잠도 들고, 그러면 절대 안 되는 일일까?
우리 집 찬장을 열어 흰 설탕을 찾아낼 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찾아냈다 한들 내게 흰 설탕 쓴다고 뭐라 할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지레 겁먹고 흰 설탕 쓰는 것에 대한 변명을 참 길게도 했다.
난 그저 당신 삶도 이따금 달콤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