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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나 Feb 15. 2022

5. 우리 옛것과의 만남

<초상화>에 대하여

사라진, 그러나 남아있는 

    

풍채가 크고 눈빛이 형형하다.” 학문과 덕행이 높은 유학자들의 초상화를 곁에 두었던 정조가 논했다. 

조선 중기 명신인 백사 이항복(1556~1618) 이야기다. 1604년 그는 호성공신(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는 공을 세운 사람) 초상화를 받았다. 이후 9년이 지나서는 위성공신(광해군을 호종)이 되어 다시 초상화를 받았다. 

무언가에 골몰한 듯 보이는 당당한 체격의 관료에게서 어린 시절 재치가 넘치던 장난꾸러기의 모습을 찾아본다. 이웃한 권율 장군의 집으로 넘어간 감나무 이야기를 비롯하여 재미난 일화를 많이 남긴 ‘오성’ 말이다. “미친 듯이 제멋대로 쏘다니며, 짐승처럼 절로 자랐다.” 그랬던 천방지축 꼬맹이가 사나이가 되고,  다섯 차례나 공신의 반열에 오른 높은 벼슬아치가 되었다. 장년의 그는 눈빛이 깊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려나, 혹여 유배지에서 생을 마치는 고달픈 앞날을 예감하였나 싶어 진다. 9대손 이유원(1814-1888)은 달리 보았다, “눈썹을 찡그린 채 만곡萬斛의 수심愁心을 담고 있으니, 백성과 나라를 위한 걱정이 온몸을 둘러싸고 있는 것 같다.”      

공신상은 낡으면 다시 그렸다. 이항복의 초상은 종가와 화산서원花山書院 등 여러 곳에 모셔졌다. 49세, 58세 백사의 초상이 나란하다. 엄격한 공신상 형식에 충실하다. 오사모에 품계를 말해주는 흉배가 달린 정장 관복을 입고 공수자세를 취한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이다. 바닥의 화려한 채전(카펫)과 흉배 문양이 달라지고 복식, 자세, 표정은 거의 그대로다. 해가 바뀌면 아이는 크지만 어른은 늙어간다. 반듯하고 굵직한 이목구비에 시간이 흘러 주름은 늘어나고 수염은 성글어졌다. 

그렇지만 세월이 백사에게 노화만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다. 그에 대한 평을 덧붙인다. “그가 관작에 있기 40년, 누구 한 사람 당색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오직 그만은 초연히 중립을 지켜 공평히 처세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서 당색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의 문장은 이러한 기품에서 이루어졌으니 뛰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오성대감에게 나이 듦은 자신의 믿음을 굳건히 하는, 고난에 당당히 맞서나가는 소신과 용기였다고 두 점의 초상화가 말없이 증언한다.


선친이 그리울 때 형의 얼굴을 보고형이 그리울 때 제 얼굴을 냇가에 비쳐본다.’ 연암 박지원이 읊었다. 

여기 보기 드문 단체 초상이 있다. 수염을 지운다면 불거진 광대와 빠른 하관이 ‘복사와 붙여 넣기’ 수준이다. “피붙이로구나!”, 한눈에 알 수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벼슬길로 나아가 3품 이상 고위직에 오른 형제가 가문의 영광을 내세우는 인증 샷이라 한다. 오사모에 시복(관원이 공무 중 입는 흉배 없는 단령) 차림은 같고 금빛 찬란한 학정금대와 각대가 다르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며 자리를 잡고 자세를 취했으리라. 큰 형의 얼굴에는 와잠이라 하는 눈 아래의 둥근 주름이나 양 입가의 팔자주름 그리고 검버섯까지 묘사되어 있다. ‘표현이 진실하여 거짓이 없다.’는 핍진의 의미가 마음 깊숙이 와닿는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하여 “어험” 소리를 낼 듯싶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입이 짧았을 것 같은 닮은꼴 형제를 한 발짝 물러나 쳐다본다. 

가운데 큰 형이 조계(1740~1813), 아래 왼쪽 조두(1753~1810), 오른쪽 조강(1755~1811)으로 윗자리가 상석이다. 나이 차가 적었다면 삼각 대열을 벗어나 나란히 앉아 어깨동무를 하지 않았을까. 슬쩍 미소라도 띠면 좋으련만 단령의 화사한 담홍색이 무색하게 얼어붙은 표정이다. 

세상에 나오는 순서는 있어도 가는 순서는 없다. 기념 초상을 남길 정도로 우애가 남달랐을 형제도 그 말을 비켜가지 못한다. 그리움은 시간을 품고 속절없이 커져 가기 마련이다. 동생들을 먼저 떠나보낸 큰 형에게 형제 초상화는 가슴 벅찬 자랑스러움이자 아물지 않을 상처였을지 모른다. 

조씨 삼형제 초상, 국립민속박물관


“5대에 걸친 한 집안의 직계 초상화를 확인한 건 처음이다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다. 5부작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초상화 권위자인 조선미 교수가 밝혔다.

강세황(1713~1791)을 중심으로 아버지 강현(1650~1733), 장남인 강인(1729∼1791), 손자인 강이오(1788∼1857), 증손자인 강노(1809~1886)까지, 5대의 초상화 작품이 한자리에 모였다. 전시 <강세황과 진주강씨 5대 초상>이었다. 벽면에 빼곡한 진주 강씨 계보를 보니 가지가 많고 잎이 무성한, 그래서 한여름 넉넉하게 그늘을 내어주는 거목이 그려진다. 한날 한 곳에서 얼굴을 마주 한 적 없는 어른들이 초상으로나마 꿈같은 대면식을 갖는다. ‘물보다 진한 피’가 서로서로를 끌어당겨 품어주고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절제된 필선과 맑고 은은한 채색으로 인물의 기품과 인격을 담아낸다. 제작시기에 따라 표현기법의 차이가 있어도 정교하고 담백한 멋은 변함이 없다. 

5점의 초상화에서 정면을 응시하는 강세황과 강이오의 초상이 눈에 띈다. 두 사람만의 특별한 관계를 암시하는 듯 느껴진다. 고고한 자태에 서릿발 같은 기운이 가득한 강세황이 누구던가. 예림의 총수로 시·서·화 삼절이다. 서권기와 아취가 그윽한 매화 그림이라고 추사가 찬문을 쓸 정도로 강이오의 그림 솜씨도 출중했다. 손자의 재주는 할아버지의 귀한 선물이다. 

200여 년의 시간 속에서 내림이 어디 가나 싶게 여기저기 닮아 있는 모습, 초상화가 한 곳에 자리하기까지의 이러저러한 이야기에 한참 동안 마음을 기울인다. 한편으로는 나를 있게 한, 나와 닮아 있을 무수한 얼굴들이 궁금하고 그리워진다. 선조들의 5대 초상이 후손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와 가치 일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를 마주한 듯싶다.      


순우리말 얼굴은 ‘얼’이 깃든 ‘굴’이라는 뜻이다. 삶의 굴곡을 모두 펼쳐 보이는 얼굴, 한 사람의 요체가 담겨있기에 누군가를 기억함은 그(그녀)의 얼굴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한 여인에 대한 전설을 가져온다. 그녀는 벽에 비친 잠든 연인의 그림자를 따라 그렸다. 다음날 머나먼 곳으로 떠나는 연인의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서다. 도공인 여인의 아버지는 딸의 그림을 흙으로 빚었다. 회화와 조각의 기원을 말하는 이야기가 마음을 울린다. 

"그린다는 것은 무엇이냐?"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리움은 그림이 되고, 그림은 그리움을 부르지요." 그림은 곧 그리움이라는 어느 소설 속 구절들과 겹쳐진다. 

얼굴 그림 초상화는 혼이 깃든 이미지로 실재하는 인간을 대신한다. 세월이 가면 이 땅을 살다 간 존재들의 흔적으로 남는다. 유한한 시간 속의 삶이 영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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