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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Sep 09. 2017

시인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넓이.

시인의 사랑. <The poet and The boy , 2017>

내 부모님은 애정표현을 어색해하신다. 아빠는 자식들과 대화를 하거나 애정을 표현하는 대신, 필요한 물건을 사주시거나 용돈을 주시곤 했고, 엄마는 사랑한다는 말과 따뜻한 손길 대신, 밥 세끼는 꼭 챙겨주셨다. 손주들에게 더이상 사랑한다는 말과 포옹과 스킨십을 아끼시지 않은 부모님은 자식들이 자만해서 안주하지는 않을까 염려되어 칭찬을 아끼셨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연애를 할 때든 친구를 사귈 때든 내 마음을 표현하는 길이 너무 어렸웠고 서툴렀다. 그때 끄때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몰라서 마음을 아끼고 싶지 않은 연인과 친구로부터 오해를 받는 일도 종종 있었지만, 부모님이 변하셨듯, 지금의 나도 의식적으로 아 지금은 좀 더 표현을 해야 하지 않을까를 생각하며 노력한다. 반면, 영화 <시인의 사랑>에 나오는 인물들은 그런 고민에 열중하고 있는 나를 무색하게, 모두들 사랑한다고 외쳐댄다. 다른 건 다 필요 없다. 너 하나면 된다. 너는 내 인생의 유일무이한 존재라며 서로 외치고 외친다. 어색할 틈도 없이.

시인과 시인의 아내 < 시인의 사랑, 2017>

시인의 사랑은 도넛을 타고.


마흔 살의 시인이 있다. 시인은 등단한 이후, 10년 동안, 시상이 떠오르지 않아 심적으로 고단한 매일을 살며, 월 30만 원을 받고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친다. 시인의 아내는 남편이 버는 30만 원도 구경 못하고 남편을 먹여 살리지만(시인은 30만 원으로 다달이 치킨을 사 먹는다), 아내에게 시인은 불같은 사랑이자 자신의 열망이다. 시인은 아내의 식지 않는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아내의 모든 요구를 수동적으로 들어준다. "사람이 간사해. 노처녀 딱지만 떼면 다 괜찮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아이도 갖고 싶다. 남들 하는 거 다하고 싶다.", "돈 버는 거 재미없어." 아내가 푸념할 때마다 시인은 자신의 아랫도리를 벗고 온 인상을 찡그리며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한다. 아내를 보고 흥분이 안 되는 건지, 우울한 일상 때문인지, 시인의 정자는 한없이 나약하고 개수는 턱없이 모자르다. 부부는 인공수정을 하게 된다.


아내는 시인의 기분전환을 위해 집 근처에 새롭게 개점한 가게에서 도넛을 사 온다. 어쩐 일인지 도넛을 먹고 생기가 돈 시인은 도넛 가게로 매일같이 드나들며 도넛을 탐닉하며 , 가게에서 일하는 소년을 지켜보게 된다. 어느 날 시인은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여자 친구와 진한 스킨십을 하는 소년을 훔쳐보고 흥분감을 느낀다. 그렇게 도넛에 대한 환희는 도넛 가게에서 일하는 아름답고 건강한 소년에게로 옮겨진다.  그리고 시인은 아내가 원하는 만큼의 정자를 배출해준다.

시인과 소년.<시인의 사랑, 2017>

사랑한다는 말이 어색한 소년.


"돈 줘." "아이고 내 팔자야." 소년의 엄마가 만원을 꺼내어 바닥에 던진다. 욕창이 있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소년의 엄마와 소년이 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또래처럼 허세도 부리고 싶고, 비뚤어지고도 싶은 소년은 술에 잔뜩 취해 몸을 못 가누다가도, 누워있는 아버지의 소변을 수발하기 위해, 소변 병을 집어 든다. 소년의 엄마는 시장에서 고단한 장사를 끝내고 비빔밥을 꾸역꾸역 입에 넣는 것이 일상이다. 아들의 반항적인 말투와 눈빛 속에서 비치는 서운함을 알아보지 못하고, 정작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아들에게 험한 소리만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식구는 손님이 집에 오면 꼭 간소하게라도 대접을 해서 보내려 한다. 한때는 다정했던 시절을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듯이. 이런 가정환경 덕분인지, 야생동물같이 날 선 눈빛으로 세상에 욕을 퍼붓다가도 정도를 지키는 소년의 행동은 낯설지 않게 그려진다.


잔칫집에서 포장해 온 반찬을 소년에게 건네는 시인.

소년:"씨발 내가 불쌍해서 이러는 거예요? "

시인:"아... 아니야."

소년 :"잘 먹겠습니다."


소년과 시인은 우연한 계기로 친구가 된다. 둘은 같이 산책을 하며 시를 읊고 교감한다. 아픔이 많은 소년은 시인의 고독을 이해하고, 시인은 소년의 아픔을 위로해 준다. 각고의 노력 끝에 임신을 하게 된 시인의 아내는 기쁨 속에 시인을 찾아다니다, 소년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시인의 시를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아내는 당황스러움과 모욕감에 휩싸여, 쌓여왔던 섭섭함과 원망을 시인의 면전에 퍼붓는다. 착한 시인은 소년을 더 이상 만나지 않기로 결심한다.


소년은 어느 날부턴가 시야에 잡히지 않는 시인을 보기 위해 시인의 집에 찾아가 그를 하염없이 기다리지만, 정작 시인은 자신을 피하며 더 이상 어울리지 말자고 말한다. 소년은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며 시인을 원망한다. 그리고 도울 일이 있으면 도와줄게라는 시인의 말에, 치기 어린 마음으로 소년은 말한다. "돈 줘요 그럼."


소년과 시인<시인의 사랑, 2017>

시인과 소년의 가볍지 않은 결말.


소년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소년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감독은 배고픈 물고기들이 수두룩한 어장에 먹이를 풀면 어떻게 되는지 실제적으로 그리고 싶어 하듯, 아버지의 상으로 고조된 시인과 소년의 관계에 불을 지피는 사건을 풀어놓고, 인물에게 끝없이 질문하고 집중하며 영화의 후반부를 그린다. 인물의 반응에 대해 배우의 의견을 수용하고, 각본을 조율하고, 배우의 감정몰입을 위해 묵묵히 기다려준 김영희 감독님의 유연함과 통찰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데, 시인의 사랑의 넓이를 느껴버린 소년의 놀란 얼굴이 아직도 내 눈에 선명하다.


시인의 사랑.


진부해 보일 수 있는 사랑의 열병은 여러 인물을 통해, 다양한 시선으로 조망됨으로써, 시인의 사랑을 진부하지 않게 만든다. 시인의 시를 이해해주진 못해도, 언제나 곁에 있어주며, 자식을 가져야 한다는 친구와 아내, 시인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동창들, 소년과의 사랑을 통해, '열린 시'를 쓰게 된 시인을 독려하는 동료 시인들, 시인의 사랑을 관조해주는 시인의 어머니의 시선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는 힘을 갖게 한다. 한때, 시인의 사랑을 머금어 본, 아내의 열망이 어색하지 않을만큼.





*윗글은 브런치에서 주관하는 무비 패스를 이용하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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