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지 말자, 행복하게 살자
2024년 9월 28일, 5년 연애와 4년 동거 끝에 결혼식을 올렸다.
여자친구와 연애할 때도, 결혼 준비를 할 때도 "이 사람이랑 결혼을 하게 될까?"라는 상상을 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된다면, 지금의 여자친구와 하고 싶다는 마음은 늘 있었다.
내 아내는 자신의 일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했고, 당연히 일을 잘했으며, 현명했다. 사람을 대하는 기술도 뛰어나 우리 부모님에게도 살갑게 대하는 모습을 보면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우리는 연애하는 동안 함께 창업을 시도하며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수없이 싸웠다. 그 과정에서 전우애 같은 끈끈함이 생겼고, 어떤 고난이 와도 함께라면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동거를 하며 퍼즐 조각처럼 어긋났던 부분들을 하나씩 맞춰나가는 시간도 가졌다.
결국, 가치관, 데이트 방식,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이 잘 맞는다는 확신이 들어 결혼을 결심했다.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아내는 본인이 어떻게 업무를 하는지 보여줬다. 웨딩플래너를 쓸까 고민하다가 "내가 직접 다 알아볼게"라며, 회사 일로 바쁜 와중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준비했다. 그녀는 결혼식을 가장 싸게 했고 잘 알아봤다며 자랑했는데, 그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나는 회사에 있었고, 오전부터 친형이 소식을 전해왔다.
"엄마 아파서 같이 병원 가"
"더 큰 병원으로 가래서 가고 있어"
그날 엄마는 여러 병원을 돌며 검사를 받았고, 결국 지주막하출혈 진단을 받고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 오후 2시경,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여동생과 함께 퇴근해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 지주막하출혈에 대해서 찾아보았고 3개월이 지났어도 병원으로 향할 때 들었던 감정들이 뚜렷하게 기억이 남는다.
평소 대문자 T라고 얘기를 듣던 나도 그 초조함, 걱정, 불안감들이 한 순간에 몰아쳤고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병원으로 향했고 간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지만, 단 한 번이라도 엄마 얼굴을 보고 싶었다.
중환자실에 바로 입원한 터라 엄마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추가 검사를 받으러 가는 동선에 짧게 볼 수 있었고, 의학 드라마에서나 보던 기계들이 엄마의 몸에 연결되어 있었다. 엄마는 천운이 따른 것인지 의식이 있는 상태였고 삼 남매와 마주한 엄마의 첫마디였다.
"밥은?"
우리는 괜찮으니 검사 잘 받고 걱정하지 말라고 잘 될 거라고 인사를 했고, 우리 삼 남매는 역시 독한 아줌마가 맞다라며 안도했고, 불안감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리고 난 화장실을 가서 오열을 했다. 그나마 너무 다행이란 생각과 미안함과 고마움 등 감정이 교차했다.
우리는 매일 정해진 면회 시간에 교대로 들어가서 엄마를 보았고, 엄마를 처음 보자마자 나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는데, 우리 엄마는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고 본인이 보험을 기가 막히게 들었다며 자랑을 했다.
진짜 독한 아줌마구나라고 생각하며 안도했는데 문제는 그 이후부터 발생했다.
평소와 같이 면회를 하러 중환자실에 들어가는데 저 끝에서부터 고통에 비명 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제발 우리 엄마만 아니여라라고 빌었는데 비명 지르는 사람이 우리 엄마였다.
이때부터 내 멘탈은 터지다 못해 산산조각 났다.
간호사한테 원래 저렇게 아파하는 게 맞냐고 물어보면서 울고, 집에 가는 길에 울고, 심지어 울다가 잠들었다.
처음 보는 내 모습에 아내도 면회가지 않는 것이 어떠냐고 자신이 면회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우리 엄마는 뇌동맥류가 2군데에 존재했고 1군데가 파열되어 중환자실 입원과 동시에 응급 시술을 진행했다.
파열되면서 뇌에 출혈이 있었고 피가 빠지는 과정에서 이게 엄청난 고통을 준 것이었다.
나아가는 과정이라고는 하는데, 비명을 지르니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눈물을 흘리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너무 다행인 것은 여동생은 고통분담제를 실시해서 집안의 기둥이 제일 많이 책임지라며 친형에게 장난을 쳤고, 친형은 그 장난을 다 받아주며 장난을 쳤다. 또 내 아내는 매일 같이 괜찮을 거라며 나를 안아주었고, 친형처럼 가깝게 지내는 형은 매일 퇴근 후 우리 집에서 나에게 장난을 쳤다.
이렇게 내 멘탈을 회복할 수 있었고, 우리 엄마의 건강도 눈에 띄게 회복할 수 있었다.
결국 엄마는 결혼식에 오실 수 없었고, 친형은 병간호를 위해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나는 엄마에게 결혼식을 보여드리고 싶어 간호사에게 영상 통화라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간호사와 교수님의 허락을 받아, 고등학교 친구가 결혼식 현장을 생중계로 엄마에게 보여주었다.
교수님께서 영상통화 해도 된다고 소식을 들었을 때,
결혼식장에서 영상통화로 엄마와 인사를 나눌 때,
친구가 영상통화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봤을 때를 잊지 못한다.
이 친구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빚을 지었고, 너무 감사함을 느낀다.
그렇게 결혼식을 마무리했고, 난 결혼식을 끝내고 아쉬움에 또 오열했다.
가족사진을 찍는데 엄마와 친형이 함께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아직까지 결혼식 사진 보는 것이 꺼려진다.
다행히도 천운이 따른 것인지 우리 엄마는 후유증 없이 건강을 많이 회복하였고, 퇴원까지 한 모습을 보고 취소했던 신혼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내가 몸을 갈아 넣어가며 일했던 이유는 더 빨리 성공하고 성장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건강과 가족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깊이 느꼈다.
또 아내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끼며, 싸울 일이 있어도 현명하게 헤쳐나가보자고 말하고 싶다.
혹시나 가족 중에 아픔을 겪고 있다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밝은 날이 올 것이라고 희망을 드리고 싶습니다.
더 한 아픔이 찾아온다면 "네가 괜찮아질 거라며" 저를 탓하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