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재 중 걸쇠 01화

의문의 봉투

낡은 장롱 속, 빛바랜 봉투를 찾았다.

by 정윤


-……신고된 전체 아동학대 건수는 48,522건으로, ……특히 학대 판단이 확정된 사례 중 85% 이상은 ‘부모에 의해’-


TV에서 무감한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뉴스가 귓가를 때렸다.


가구라고는 달랑 장롱 하나에 TV 하나가 전부인 방을 뒤지던 시은은, 방바닥에 있던 리모콘을 들어 소리를 줄여버렸다.


“이건 대체 왜 켜놓고 간 거야…….”


찬혁의 짓이다.


‘그래도 혼자 조용한 집에 있는 것보단 나을 거야.’


문을 나서던 순간까지 자신을 걱정하던 다정한 얼굴.

언제고 변함없던 그 따스함이 지친 기색이 역력하던 시은의 얼굴 위에 한줌 미소를 피워냈다.


“목숨 걸고 사람 구하러 가는 게 누군데. 누가 누굴 걱정해.”


시은의 약혼자인 찬혁은 소방관이었다.

언제든 큰 사건이 터지면 쉬는 날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달려가야 하는 소방관.


그런 주제에, 제 곁을 지키겠다고 벌써 사흘이나 일을 쉬었다.


시은은 비뚤어진 하얀 리본핀을 고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약혼자이긴 하지만 아직 결혼 전인데도 벌써 이만큼이나 신세를 졌다.


시은은 새까만 제 상복만큼이나 새까만 머리를 다시금 비워내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에서야 장례가 끝났지만, 아직도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았다.

시은은 다른 모든 일 전에 우선 엄마의 집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엄마는 짐이 많지 않았다.


시은이 기억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엄마의 짐은 언제나 20인치 캐리어 하나에 마구잡이로 쑤셔 넣어도 다 들어갈 정도로 적었다.


새 물건을 잘 사지도 않았을뿐더러 사는 만큼 또 내다 버렸다.

처음엔 집이 작아서 그런가 싶었지만, 그녀가 성인이 되어 자취를 시작한 이후에도.

엄마의 짐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고인의 짐을 정리하는 전문가를 부를까 하다 제가 직접 정리하겠다고 결정을 내린 것은 그래서였다.

그녀가 기억하는 한, 엄마의 물건은 늘 언제고 어디든 훌쩍 떠날 수 있을 정도로 간소한 편이었으니까.

그만큼 시은은 엄마가 뭘 가지고 있는지, 그것들을 어디에 두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었고, 제가 모르는 물건 또한 적을 것이었다.


분명, 그럴 거라고 믿었다.

엄마의 장롱 깊숙한 곳에서, 툭 굴러 나온 봉투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이게 뭐야……?”


테이프로 칭칭 감은 빛바랜 봉투.

흐려진 세월 속에도 선명히 남은 이름.


‘박시은’.


분명, 자신의 이름이었다.




봉투는 생각보다 두꺼웠다.


뭘 넣어뒀는지는 몰라도, 약간은 무거운 느낌마저 들었다.


시은은 검은 저고리의 소매를 둘둘 말아 올리며 앞뒤로 감긴 테이프 사이를 힘껏 잡아 뜯었다.


찌익, 소리가 나며 봉투의 꼭대기 부분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원체 오래된 봉투가 그런지 잔뜩 힘을 주고도 한참을 힘겨루기를 하길 몇 차례.


-촤르르, 쫘악!


시은은, 마침내 봉투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내용물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는 사진.

빛바래고 흐려져서 내용을 쉬이 알아볼 수 없는 정체 모를 서류.

간혹 보이는 실종 아동 전단과 무언가 잔뜩 휘갈긴 엄마의 다급한 글씨까지.


시선을 옮겨가며 바닥에 흩어진 것들을 살펴보던 시은의 얼굴에 선명한 당혹감이 드러났다.


아무리 봐도 족히 20년은 넘은 것 같은 것들뿐이다.

시은의 성마른 시선 속에 잡힌 것들만 대강 훑어도 그랬다.


전단 속 아동들의 출생년도는 시은과 같거나 비슷했다.

서류 속 날짜 역시 시은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사진의 색감도, 사진 속 옷차림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촌스럽고 오래된…….


그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것들 속에서, 사진 한 장에 시선이 닿았다.


두세 살쯤 되었을까.


젖살이 다 빠지지 않은 동글동글한 얼굴.

표정에서 보이는 장난기와, 한껏 휘어있는 눈매.

낯익은, 그리고 익숙한.


언젠가 엄마가 보여주었던 앨범 속에 있던, 유치원에 다닐 때의 자신과 꼭 닮은 모습.


시은이 천천히 그 사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뻗는 손이 잘게 떨리는 줄도 모르고, 말아 올렸던 까만 저고리 소매가 어느새 손목까지 내려온 줄도 모르고.

천천히, 집어든 그 사진은.


‘윤혜정, 3세.’


전혀 모르는, 단 한 번도 제 것인 적 없던 이름이 쓰여있었다.


손의 떨림이 거세졌다.

사진이 떨리는 건지, 손이 떨리는 건지 모를 정도로.


한참이나 그 사진을 들여다보던 시은은 저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거세게 떨리던 사진이 힘없이 팔랑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팔랑팔랑, 떨어지던 사진이 휙, 허공에서 반바퀴를 돌았고.

마침내 드러난 그 사진의 뒷면엔.


문 잠가!!


마치 비명 같은.

하지만 제게는 귓가에 떠오를 정도로 익숙한.

엄마의 목소리가, 절규처럼 울리며 사진 뒷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keyword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