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전 국가적인 외환 위기(IMF) 때문에 수많은 기업들은 달러가 부족해졌습니다. 채권단에게 달러를 갚아야 할 시기가 되자 돈을 갚지 못하여 수많은 기업들이 부도가 났습니다.
진로 또한 외환 위기라는 시장의 큰 흐름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1997년 4월 5200억 원의 빚을 갚는 기간을 연기하는 ‘화의 신청’을 합니다. 현재 소주 1등 참이슬을 개발하고, 현재 맥주 1등 카스를 개발한 진로쿠어스 맥주를 OB에 팔고, 위스키 회사 진로 발렌타인스를 프랑스 위스키 업체 페르노리카에 팔고, 이외의 수많은 계열사들을 매각하여 현금을 마련했습니다.
신제품참이슬이대박이나면서영업이익은흑자가나기도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골드만삭스라는 미국 투자 은행에 해외 자본 유치와 구조 조정을 위한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진로는 몰랐습니다. 골드만삭스가 진로 기업 역사에 가장 강력한 뒤통수를 때릴 것이라는 사실을요.
위 기사의 영상을 보시면 진로의 노동조합이 격렬하게 하이트의 진로 인수를 반대하고 있는 장면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하이트가 진로를 인수하게 되면 골드만삭스가 1조 원이라는 거금을 챙기게 되어 국부가 유출되기 때문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진로와 골드만삭스 사이에는 무슨 일이 생겼고, 직원들은 왜 이리도 강하게 반발하는 걸까요?
2003년 3월 빚을 갚아야 하는 시기가 왔습니다. 이자는 갚을 수 있었는데요, 원금을 갚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해외에서 투자를 받을 예정이니 빚을 갚는 기간을 연장해달라고 채권단에 요구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채권단은 채권을 보유하고 있는 단체를 뜻합니다. 채권은 빌릴 채, 증서 권입니다. 돈을 빌렸다는 증서를 뜻합니다. 채권은 개인이 아니라 기관이나 기업 등에서 거액의 돈을 빌릴 때 사용합니다. 채권에는 빌린 금액과 갚아야 하는 시기가 적혀있습니다. 돈을 빌려준 사람은 채권에 대한 이자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채권단 중 규모가 가장 큰 곳이 어디였는지 아세요? 바로 골드만삭스였습니다! 골드만삭스는 진로의 부실 채권을 여러 번 사서 1대 채권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골드만삭스는 냉혹했습니다. 채권의 만기가 지난 2003년 4월 골드만삭스는 법정관리를 신청합니다. 법정 관리는 법원이 기업과 금융권 사이에 개입해 기업을 파산할지, 회생시킬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법원이 골드만삭스의 법정관리 신청을 받아들여 법정 관리를 개시하느냐를 두고 진로와 골드만삭스의 피 튀기는 싸움이 시작됩니다.
법정 관리 신청을 두고 진로와 골드만삭스의 혈전
Round 1. 법정 관리 신청은 무효?
사실 법정 관리 신청은 골드만삭스가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일랜드에 위치한 세나인베스트먼츠가 법정 관리 신청을 했습니다. 갑자기 아일랜드에 있는 회사가 왜 진로의 법정 관리 신청을? 이를 수상히 여긴 진로가 확인해본 결과 세나인베스트먼츠는 2002년 11월에 골드만삭스가 아일랜드에 만든 회사였고 2003년 1월에는 골드만삭스가 세나인베스트먼츠에게 진로의 채권 870억 원을 양도해서 그해 4월에 세나인베스트먼츠가 법정 관리 신청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진로 측 주장
“이에 진로는 골드만삭스가 페이퍼 컴퍼니, 즉 유령 회사를 만들어 위탁 소송을 했다. 실제로 국내 대법원 판례도 이러한 소송을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아일랜드 회사로 소송을 한 것은 한국 법원의 관할권을 회피하기 위한 꼼수다. 그러므로 법정 관리 신청은 무효다.”
골드만삭스 측 주장
“반면 골드만삭스는 세나인베스트먼츠는 자본금과 이사회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유령 회사가 아니다 한국의 투자회사들도 대부분 페이퍼 컴퍼니이기 때문에 문제없다 진로 채권 매입은 한국과 아일랜드 법에 맞게 이루어졌다.”
법원은 골드만삭스 측 주장이 옳다고 판결했습니다.
Round 2. 골드만삭스는 비밀 유지 협약을 어겼다?
1997년 4월 진로는 골드만삭스와 자문 계약을 맺으며 비밀 유지 협약을 맺었습니다.
진로 측 주장
“골드만삭스는 우리의 채권을 저렴하게 매입했다. 그건 비밀 유지 협약을 어기고 우리 회사 내부 정보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내부 정보를 확인해보니 회사의 기초가 튼튼해서 채권 이자도 모두 받을 수 있고 이후 매각까지 비싸게 할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골드만삭스 측 주장
“우리는 진로의 채권을 비밀스럽게 매입한 것이 아니다. 자산관리공사가 주최한 공개입찰에서 진로와 다른 회사의 부실채권을 함께 인수했다. 채권 매입은 진로의 내부 경영 정보가 아니라 공개된 정보를 이용했다. 마지막으로 골드만삭스는 자문 부서와 투자부서가 나뉘어있고 정보 교환도 못하게 때문에 진로의 비밀정보를 이용해 투자한 적이 없다.”
법원은 골드만삭스의 주장을 이번에도 인정했습니다.
Round 3. 골드만삭스는진로의외자유치를고의적으로막았다?
진로 재팬은 1996년 일본 시장 내 86개 희석식 소주 업체 중 1위를 차지를 하였고 이후 2004년까지 희석식 소주 시장에서 7년 연속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좋은 기업이었습니다. 한편 진로 재팬은 진로 홍콩의 소유였는데요, 진로는 진로 재팬을 매각하여 현금을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또 골드만삭스가 등장합니다.
골드만삭스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진로 홍콩의 채권을 매집했습니다. 쉽게 말해 진로에게 돈을 빌려준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2001년에 채권의 변제를 요청, 즉 돈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진로는 돈을 갚기 힘들었고 진로 홍콩은 파산합니다. 또한 골드만삭스는 진로 홍콩 소유의 진로 재팬에 대한 상표권도 가압류하였는데요, 이 때문에 진로는 진로 재팬을 매각할 수 없었습니다.
진로 측 주장
“골드만삭스는 진로 홍콩과 재팬의 매각을 방해했다. 그리고 파산 신청, 가압류를 해서 진로가 투자하기 위험한 기업이라고 몰아갔다. 우리 회사가 회생에 실패한 건 골드만삭스 때문인데 골드만삭스가 법정 관리를 신청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골드만삭스 측 주장
“우리가 진로 재팬이나 홍콩에 파산 신청과 가압류를 했던 건 채권자로서의 권리였다.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는 투자 부서랑 자문 부서가 나뉘어 있다. 그래서 진로의 해외 자본 유치를 막으려 했던 게 아니었다.”
이번에도 법원은 골드만삭스의 편을 들어줬습니다.
재판부의 최종 결정
“진로는 9천6백억 원의 빚을 갚았으나 아직 1조 7천억 원의 빚이 남아있다. 또한 영업 이익은 매년 1천억 가량 올렸지만 이자 지급 등의 비용으로 5년 동안 적자였다. 진로가 주장하는 해외 자본 유치의 규모, 방식, 시기는 근거 있는 자료가 없고 성공적으로 이뤄지더라도 남은 빚을 다 갚을 수 없다. 따라서 진로의 요청대로 빚을 갚는 기간을 연장하는 것은 채권자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정 관리를 진행한다.”
이후 법정 관리가 개시되어 진로는 M&A, 즉 기업 인수 절차를 밟게 됩니다.
치열했던진로인수경쟁과 아시아 M&A 최고 가격
진로의인수를희망하는기업은두산, 오비, 롯데, CJ, 하이트등이있었습니다.
두산에는 두산 주류가 있어서 진로의 합병을 통해 소주 시장을 장악하려 했습니다. 오비 맥주의 최대 주주인 AB인베브 역시 진로 2대 채권단인 대한전선과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롯데 CJ 등도 각각 아사히 기린맥주 등 일본 맥주사와 컨소시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이트는 진로를 다른 회사에 뺏길 경우 미래의 맥주 사업의 생명이 불투명하다고 생각하여 절박한 심정으로 인수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골드만삭스는 진로 몸값 불리기 작전도 펼칩니다. 골드만삭스는 2003년 4월 진로의 기업가치는 2조 5000억 원이라고 발표했다가, 2004년 3월 1일 자 파이낸셜타임즈를 통해 '진로의 기업가치는 36억 달러'(3조 6000억 원)라는 기사를 발표합니다. 진로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던 골드만삭스는 진로를 최대한 비싸게 팔고 싶었겠죠. (그런데 이 파이낸셜타임즈의 실제 기사를 찾고 싶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네요.)
경쟁사인 대한전선, 두산, CJ가 2조 8000억~2조 9000억 원을 제시한 것과 달리 하이트는 무려 3조 4288억 원을 제시하였습니다. 이 가격은 그 당시 아시아 기업 매각 사상 최고 가격이었습니다. 그 결과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인수전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독과점 논란
하이트는 국내 맥주 1위 기업이었고, 진로는 국내 소주 1위 기업이었기 때문에 하이트가 진로를 인수하면 주류 시장을 독과점한다는 논란이 생겼습니다. 하이트의 경쟁사 오비에서 하이트의 진로 인수 반대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지방 소주 업체들도 공룡 주류 기업이 탄생해 경쟁이 힘들어진다며 반대했습니다.
하이트와 진로의 인수합병이 독과점이 된다는 우려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습니다.
첫째, 하이트의 맥주(57.9%)와 진로의 소주(55.4%) 시장 점유율을 합치면 100%를 넘어갑니다.
둘째, 하이트에는 하이트주조라는 소주 회사가 있는데 진로의 소주와 합치면 시장 점유율이 50%를 넘습니다.
특히 전북 지역 소주 점유율은 진로 50.5%, 하이트주조 42.5%로 합치면 93%에 달합니다.
셋째, 두 회사 모두 먹는 샘물을 제조해서 생수에 대한 독과점 문제가 있었습니다.
넷째, 소주와 맥주가 별도 시장이더라도 유통망이 유사하여 유통에 대한 독과점 문제가 발생합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하이트의 진로 인수가 독과점에 해당하는지 발표합니다.
첫째, 맥주와 소주는 별개 시장이기 때문에 독과점이 아닙니다. 맥주와 소주는 원료, 맛, 도수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고 연령, 성별, 계절별 소비 패턴이 다릅니다. 계량적인 방법인 임계매출감소분석(Critical Loss Analysis) 결과 별개의 시장으로 나타납니다. EU, 미국, 영국 등 해외에서도 도수의 차이에 따라 개별 주류를 별개 시장으로 인정하여 기업 인수를 허가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둘째, 진로의 소주 시장 점유율은 55.4% 이지만 하이트주조의 시장 점유율은 2.5%라는 작은 수치가 더해지기 때문에 소주 시장에서의 독과점이 형성된다고 보기 어렵다. 진로가 50.5% 하이트주조가 42.5%를 차지하는 전북 지역은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가정했을 때 독과점이 발생하지 않는다. (자세한 내용은 공정거래위원회 자료를 참고하세요. 분량이 꽤 길어서 생략합니다.)
넷째, 먹는 샘물은 진로가 10.5% 하이트가 6.2% 합쳐서 16.7%로 독과점이 아닙니다.
반면 주류 유통망에 대해서는 독과점이 형성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강화된 시장지배력을 이용하여 소주 및 맥주 가격을 인상할 우려가 있고 유통망 장악력으로 끼워 팔기를 통해 다른 주류 회사들을 배제할 가능성이 있으며 신규 주류 회사의 주류 시장 진입이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통망에 대한 독과점이 생기지 않도록 다음과 같은 조건을 걸고 인수를 허락했습니다.
첫째, 향후 5년간 가격 인상폭을 소비자물가상승률 이내로 제한할 것
둘째, 주류도매상과 거래할 때 지위를 이용하여 부당하거나 강제성 거래를 막을 방안을 3개월 이내에 제출하고 5년 동안 이행할 것
셋째, 5년간 양사의 영업조직과 인력을 분리 운영할 것
넷째, 반기별로 양사의 생산, 판매량을 공정 거래위원회에 보고할 것
그 이후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하이트는 진로를 인수해 하이트진로가 되었습니다.
결국 최대 수혜자는 골드만삭스
진로가 하이트에 인수되면 외국 자본에 국부가 유출된다면서 노조 직원들이 인수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로의 M&A 과정에서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골드만삭스였습니다.
외환 위기 때는 한국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서 진로의 채권을 매입할 주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액면가의 5~20% 수준으로 헐값에 매입할 수 있었습니다. 골드만삭스는 진로의 부실채권 1조 4600억 원을 액면가의 18.4%인 2740억에 사들였습니다. 이후에도 채권 매집을 계속하였고요.
장진호 씨는 진로의 2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수많은 계열사를 설립하였습니다. 갑자기 너무 많은 계열사를 늘렸고, 외환 위기가 오면서 불법을 저지르고 맙니다.
자본이 완전히 잠식된 진로건설 등 4개 계열사에 이사회 승인 없이 계열사에 6000억 원대의 자금을 부당지원, 분식회계를 통해 금융 기관에서 5500여 억 원의 사기 대출의 혐의로 징역 2년 6월,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습니다.
그 사이에 진로는 법정 관리에 넘어갔습니다. 장진호 전 회장은 보유 중이던 진로 주식 119만 9474주(8.14%)를 '진로살리기운동본부'에 양도하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납니다. 법원의 정리계획안 인가에 따라 장 전 회장이 가지고 있던 진로 주식 119만 9474주(8.14%)가 휴지 조각이 되었고 그의 재산도 대부분 법원에 의해 가압류되었습니다.
집행 유예가 끝나기 전 장 전 회장은 비자금 75억 횡령에 대한 재수사가 시작되자 캄보디아로 도피합니다. 기소 중지, 즉 사건 수사가 중지된 상태로 10년여간 해외를 떠돌았습니다. 수백억 원 상당의 세금이 체납된 상태여서 한국에 들어올 수도 없었습니다. 은행, 부동산 개발 회사, 카지노 등을 운영하며 재기를 노렸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2015년 베이징에서 63세라는 이른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글을 마치며
드디어 진로 기업 리뷰 마지막 편을 마쳤습니다. 사실 진로 1편 글을 2021년 4월에 올렸는데 1년 5개월 만에 끝을 냈네요. 그동안 본업인 개발 일이나 만화, 녹음 등 다른 일들을 하다 보니 이렇게 오래 걸렸습니다. 뭐 오래 걸렸지만 결국 해냈다는 게 좋은 거겠죠.
진로를 리뷰하면서 주류 회사에 내가 몰랐던 재밌는 이야기들이 많구나 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마 다음 편은 하이트나 오비를 리뷰해볼 것 같습니다. 대기업들에 대한 리뷰를 마치고 나면 조금 작은 기업들도 리뷰해보고 싶네요.
그럼 다음 편도 기다려주세요.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동일한 내용 유튜브에도 업로드 했답니다. 만화 그림으로 함께 설명했는데 관심있으시면 보러 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