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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천희 Jul 12. 2020

미술 입시 학원에 웬 공대생이

공대생의 미술 입시 도전 실패기

"엄마, 나 미술 입시 도전해보고 싶어."

어머니의 대답은 No 였다. 아버지에게도 얘기를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이 얘기를 드렸던 곳은 군인 시절 공중전화 박스였다. 다음 주 다시 전화를 드려 미술 입시를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부모님은 허락해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미술 입시에 비용이 많이 든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부모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도전도 못해봤을 것이다. 다시 한번 부모님께 감사를 드린다.


나는 공대생이었다. 원하던 전공인 컴퓨터 공학과에 진학했지만, 전공 공부보다는 미술관과 갤러리를 관람하는 게 더 재밌었다. 대학생이 되고 처음 본 전시 "Who's afraid of museums?"에서의 옥색 설치물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전시를 볼수록 예술가가 되고 싶은 욕망이 커졌다.

나는 설치 예술을 가장 좋아해서 조소과에 가고 싶었다. 조소 학원에 가서 상담을 해보니 내 수능 성적이면 서울대에 지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어느 대학교에 들어갈지 정하는 것은 미술 실기 실력이 아니라 수능 성적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4년 전에 봤던 수능 성적에 맞춰 서울대와 홍대 그리고 한예종을 지원하기로 했다. 서울대, 한예종은 조소뿐만 아니라 그림 실기도 보기 때문에 그림을 배우게 되었다.


처음 가본 미술학원은 굉장히 신기했다. 학원에는 흙으로 사람의 얼굴을 만드는 학생들이 여러 명 있었다. 바닥과 신발에는 흙으로 가득했다. 조소란 흙, 나무, 금속, 돌 등으로 형상을 만드는 것인데 입시 미술에서는 흙을 사용한다. 조소를 처음 해봤는데 보기보다 꽤 어려웠다. 사람 손을 조소했는데 인체의 굴곡을 표현하는 게 어려웠다. 이후에는 사람 얼굴을 조소하기 시작했다. 소묘를 배우는 학원에서는 정물화와 인물화를 그렸다.

나의 첫 조소 작품

여름방학 즈음부터 학원 선생님의 권유로 서울의 미술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서울대 입시를 전문으로 하는 학원이 부산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산에서 같은 학원을 다니던 고3 친구와 함께 서울에 갔다.


서울 학원에서는 매일 시험을 봤다. 약 60명이 서울대 시험 시간인 4시간 동안 시험 문제를 풀었다. 서울대 시험은 제한된 재료와 도구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게 한다. 예를 들어 4색 색연필이나 검은 볼펜, 색종이 등이 재료다. 서울대 시험 문제들은 재밌는 게 많아서 수업 시간에도 재밌는 문제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1번 문제 : 가상의 악기를 만드시오, 2번 문제 : 그 악기를 연주하는 손을 그리시오."가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나면 모든 학생들이 그림을 벽에 붙인다. 선생님들께서 지나가면서 잘 그린 그림에 스티커를 붙였다. 그리고 선생님들의 강평이 시작된다. 그림이 어떤 점에서 좋은지, 아쉬웠는지 평가를 했다.


잘 그리는 친구들의 그림을 보면 정말 대단했다. 3색 색연필로 그렸는데 20색의 색연필로 그린 것 같은 그림도 있었고, 지금 당장 미술관에 붙여도 손색없을 그림들도 있었다. 대단한 그림들 사이의 내 그림은 초라해 보였다. 물론 나는 시작한 지 몇 개월밖에 안되어 오래 그림을 그린 친구들보다는 못 그리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주눅이 들고 열등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범접할 수 없었던 학원 친구의 그림(빨파초노 4색 색연필로 그린 그림이었다)

인물을 표현하는 것이 특히 힘들었다. 조소에서는 사람 얼굴을 만드는 것이 어려웠고, 그림에서는 인체를 그리는 것이 어려웠다. 스포츠를 하는 인체의 누드 그림을 그리는 시험 문제를 그린 적이 있었다. 나는 인체를 안 보고 그리는 것이 어려웠다. 인체를 관찰하고 기억하는 것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림을 다 그렸는데 너무 쪽팔렸다. 그림을 벽에 붙이기가 싫었다. 그런데 벽에 붙이지 않으면 나 자신에게 지는 것 같았다.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벽에 그림을 붙였다. 선생님의 평가는 당연히 별로였다. 평가가 끝나고 학생들이 그림을 구경하러 다니는데 어떤 학생이 내 그림 앞에 섰다. "그림이 이게 뭐야!?" 그 친구가 내 그림의 한쪽 귀퉁이를 들춰서 내 이름을 확인하는 것을 봤다. 그날은 열등감을 가장 크게 느꼈다. 인체를 못 그릴 수록 더 그려봐야 하는데 자신감이 부족해진 나는 시험 때 인체를 더더욱 그리지 않게 되었다.


서울대 수시 1차 시험을 치르는 날이 되었다. 시험장은 킨텍스 전시장에서 진행되었다. 전시장엔 끝도 없는 응시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넓은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시험을 치르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시험 문제 중 1번은 키가 다른 세 사람 A(85cm), B(120cm), C(160cm)가 함께 있는데 세 인물의 장소 및 상황을 서술하고, 2번은 A의 시각에서 본 B와 C의 시각에서 본 B를 화면에 그리고, 3번은 세 인물의 상황에서 모티브를 딴 입체 작품을 스케치하는 것이었다. 정말 어려웠다. 한참 생각하다가 그림을 그렸다.


다음날 학원에선 시험 때 그렸던 것을 재현작으로 그려서 선생님께 보여드렸다. 선생님 한 분은 "왜 이렇게 그렸어"라고 하셨고 다른 선생님께서는 "문제 2번은 아쉽지만 문제 3번은 가능성이 있으니 기다려보자."라고 위로를 해주셨다. 하지만 누가 봐도 명백히 불합격이었다.


결국엔 서울대 수시에 떨어졌다. 수시에 떨어지니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만두고 싶었다. 그만두면 복학 전까지 4개월을 쉴 수 있었다. 자취와 학원 비용도 아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한예종과 수능 시험까지 끝을 보기로 했다. 일종의 오기였다. 도중에 그만두면 패배자가 되는 것 같았다. 수능을 잘 치면 홍대에 지원할 수 있었다. 홍대는 특이하게도 실기 시험은 없었다. 포트폴리오를 제출하고 수능 성적이 좋으면 갈 수 있었다.


한예종 실기를 준비하면서 열심히 수능 공부도 했다. 대치동 도서관에 가서 오랜만에 언어, 외국어, 수리 영역을 공부했다. 대치동 도서관은 나에게 특별한 곳이었다. 재수생 시절, 대치동의 재수 학원을 다니며 대치동 도서관을 들락날락거렸다. 그런데 대치동 도서관을 또 오게 될 줄이야. 다시 수능을 공부하니 실력이 예전 같지 않았다.


수능날 점심에 먹을 도시락이 필요했다. 집에 요리 도구가 없어서 사 먹어야 했다. 수능 시험 전날에 자주 사 먹던 한솥 도시락 사장님께 물어보았다. "혹시 내일 아침에 몇 시에 여시 나요?" 아침 9시에 연다고 하셨다. 무슨 일이냐고 하셨다. 내일 수능 시험이라서 점심때 먹을 도시락을 사갈 수 있는가 싶어 물어본다고 했다. 그러자 사장님께서는 내일 아침 일찍 가게 문을 열어서 도시락을 싸주시겠다고 했다. 다음날 새벽 6시 30분에 찾아가니 사장님께선 머리도 못 말린 채 도시락을 준비하고 계셨다. 도시락과 따뜻한 마즙을 담은 보온병을 주셨다. 사장님이 너무 감사했다.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핑 돈다. 시험을 마치고 보온병을 갖다 드릴 때 사장님이 안 계셔서 다음에 한번 더 찾아가 고맙다고 인사를 드렸다.


내 인생에 또 수능 시험을 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재수를 포함해 세 번째였다. 1교시 언어 영역, 첫 번째 지문이 굉장히 어려웠다. 어려우면 다음 지문으로 넘어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너무 오랜 시간을 잡아먹었다. 결국 끝까지 풀지 못했고 망치고 말았다. 결국 홍대에 지원할 수 없는 성적을 받고 말았다.


한예종 시험도 보았다. 실기는 한예종답게 특이했다. 감독관이 그리는 대상이었다. 10분 동안 관찰할 시간을 주었다. 10분 뒤에 감독관은 다른 고사실로 갔다. 나는 관찰력과 기억력을 중점적으로 평가하겠다는 의도의 시험이라고 파악했다. 하지만 인물을 그리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열심히 그렸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초딩 그림처럼 그렸다. 한예종도 떨어졌다.


대학 동기들을 만나서 술을 마셨다. 1년 더 도전해보라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난 미련 없이 미술 입시를 포기했다. 그림을 그리거나 조소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술 전시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과 미술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달랐다.


결국 미술 입시 도전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 도전을 후회하지 않는다. 사실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었다. 그때가 아니었다면 언제 그렇게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었을까. 고3 입시생들처럼 열심히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미련 없이 미술 대학의 길을 포기할 수 있었다. 잘하는 친구들의 그림들을 보며 감탄했다. 학원의 친구들과 경쟁을 하며 그림을 그렸다. 가끔은 나도 선생님께 칭찬을 받는 그림을 그린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어떻게 그려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미의 기준을 약간이라도 깨우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미술 입시를 도전하는 과정에서 내가 예술가가 된 것 같았다.

내 작품들

그 후엔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한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예술의 끈은 놓지 않고 있다. 그림 일기도 그리고 음악도 하고 있다.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회사에서 남의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예술가도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점에서 내가 되고 싶은 자유로운 사람이란 것도 예술가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그때의 도전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내 꿈을 이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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