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치니까 소나기란다
글이 없었던 두 달 남짓의 기간 동안 정신없이 지냈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과제를 꾸역꾸역 해내기도 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인간관계로 어지러운 나날들을 보내기도 했다.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면 브런치에 들어와 관심작가들의 글을 읽으며 마음의 위안을 얻기도 했다.
어느덧 올해도 두 달이 채 남지 않았다. 스물다섯의 나는 무엇이 바뀌었을까 생각해 봤지만 굳이 변화라고 한다면 끽해야 나이 정도와 나에게 여유는 많지 않다는 마음가짐 정도였다. 여전히 나는 대학생 아무개로의 삶을 살고 있고 어른이라고 불리는 철부지이다.
생각해봤는데 난 여전히 철부지야
누군가가 그랬다. '노는 게 제일 좋은 거 보니 난 전생에 뽀로로였던 것 같다'라고. 지금 내 모습이 딱 그렇다.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노는 거라면 그저 좋아서 불나방처럼 달려든다. 나의 행복의 전부인 이 모든 것이 언젠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사라질 것을 알기에 유달리 생각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한번 사는 인생 제대로 즐겨야 하지 않겠냐는 혹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 됐건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지금이다. 5년 후의 내 모습보다 20년 후의 내 모습이 더 두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난 분명 못해본 것들에 대해 더 많은 후회를 할게 분명하다.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지'만 최선을 다해 인생을 즐기는 당신과 우리는 밤낮에 관계없이 너무도 아름답다.
사실 그렇다. 20대에 충분히 놀아두라는 연배가 높으신 어른들의 말씀을 나는 너무도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중이다. 놀아도 후회하고, 놀지 않아도 후회할 거라면 좀 더 놀아두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지 않을까?? 돈만 충분히 있었다면 더 재밌게 놀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건 좀 아쉽다. 아무튼 확실한 건 아무리 놀아도 놀거리는 아직도 너무 많다는 것. 아마 죽을 때까지 놀아도 다 놀지 못할 것 같다.
아니야 철부지 인척이라도 하고 싶었어
글쎄 모르겠다. 노는 게 좋다고 얘기했고 정말 노는 게 좋긴 하지만, 다가오는 현실을 비웃으며 놀만큼 나는 그런 위인은 못된다. 마음속에 언제나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며 나에게 속삭인다. 거의 대부분의 속삭임은 악마의 승리로 끝이 나는 게 대부분이지만. 어쩌면 정말 별거 아닌 것들을 나는 놓지 못하고 있다. 이런 완벽하지 못한 즐거움 속에서 나마저 아스라이 사라져 버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우리 학교에는 은행나무가 가로수로 설치되어있다. 가을이 되면 낙엽이 멋들어지게 물드는데 얼마 전 단풍이 절정이었다. 노랗게 물든 낙엽이 정말 아름다웠는데 그 풍성하던 나무가 불과 이틀 만에 가지만 앙상하게 남았다. 얼마나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낙엽이 떨어졌는지 바닥이 푹신할 정도였으니까. 푹신해진 거리를 걸으며 가지만 덩그러니 남은 나무들을 보면서 뜬금없이 내 생각이 났다. 불현듯 풍성하게 채워진 즐거움이 내가 미처 손을 써볼 새도 없이 떨어져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땅에 떨어진 보잘것없는 것들로 인해 내가 점점 초라해져 버리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나는 자꾸 앙상한 나뭇가지를 닮아가려 했다.
가만히 있어도 더워서 숨이 막히던 계절이 시린 숨을 머금게 되는 계절로 변하는 동안, 애석하게도 내 마음에 있던 나뭇잎은 시린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씩 자꾸만 떨어졌다. 계절이 바뀌는 시간만큼이나 꿈꿨던 이상이 현실로 변해버리는 시간 또한 너무도 빠르게 다가왔다.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현실에게 그런 자비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12시가 되어버린 시계를 마주하는 신데렐라의 기분이 이런 것이었을까.
어쩌면 나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했을지도. 알고 있지만 정말 인정해버린다면 마음이 너무 아프니까. 왜 사람들이 그러지 않는가,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내 마음은 아무래도 마음이 덜 아픈 쪽을 택하는 게 좋았나 보다.
그래도 소나기는 그친다잖아
내 마음의 소나기는 지금도 여전히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방법이 없어 우두커니 지켜보고만 있는 중이다. 어쩌겠는가 이미 내 옷이 너무 젖어버려 나갈 엄두가 나질 않는데. 세차게 내리는 소낙비를 바라보다 보면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젖어버린 내 몸에 대한 투정부터 과연 이 비가 그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그리고 이따금씩은 소나기가 내리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 달관인지 체념인지 모를 자세까지.
가끔 우산을 씌워주는 고마운 사람들도 있지만 결국 그 우산은 내 것이 아니기에, 나는 아직 소나기를 뚫고 갈 수가 없다. 그래도 조금씩, 소나기를 이겨낼 우산을 만들고 있다. 지금의 소나기를 버텨내기엔 내 우산이 아직 연약해 나는 또다시 젖을게 분명하기에, 나의 우산을 튼튼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더하고 있다. 그러다 보면 우산을 쓸 필요가 없게 내 마음의 날씨가 화창하게 개어있지 않을까.
화창하게 반짝이는 햇살도 보고 싶고, 어두운 하늘에 덩그러니 떠있는 달빛도 보고 싶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소나기는 결국 그치게 되어있으니까. 비 개인 하늘이 원래 더 맑은 법이니까. 지금의 소나기가 지나가면 나는 좀 더 맑은 마음들을 보게 되지 않을까? 나에게 되묻는 지금 이 시간에도 소낙비는 현재 진행 중이지만, 내리는 소나기에 손을 내밀어 빗방울을 느끼며 미소를 머금을 수 있을 것 같다. 그치고 나면 더 이상 느끼지 못할 것들이라면서.
소나기
갑자기 세차게 쏟아지다가 곧 그치는 비. 특히 여름에 많으며 번개나 천둥, 강풍 따위를 동반한다.
세차게 쏟아진다고 너무 마음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나기는 결국 곧 그치는 비일뿐이다. 천둥번개가 몰아치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질 것이다. 그러고 나면 뿌옇던 세상이 조금 더 맑게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까. 더 아름답게 보일 세상을 위해, 조금 불편한 것일 뿐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다.
아직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과 아름답게 봐야할 것들이 아주 많이 남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