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인생 앞에서, 숨을 고르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by 준희최

아무 일도 없던 하루였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차오르는 날이 있었다.


일에 치이다가,

운전대를 잡다가,

아이들을 씻기다가…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불쑥,

이름 모를 파도가 나를 덮치곤 했다.


이유 없이 마음 한구석이 시큰해지고,

목구멍에 뜨거운 돌덩이가 걸린 듯한 감각.

나는 차오르는 한숨마저 뱃속으로 밀어 넣었다.


"오늘 일이 좀 힘들어서 그래."


아내의 의아한 눈빛을 등지고,

나는 도망치듯 침대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 파도의 정체를 처음 마주한 것은,

내 두 딸의 얼굴 속에서였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웃음 속에서,

나는 웃지 못했던 내 어린 날을 빗대어 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부딪히는

이 불협화음의 진원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지난 시간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두 번째 인생’이라는 말이

처음 마음에 들어왔을 때,


나는 설렘보다 무거운 돌덩이를 먼저 느꼈다.


괴로움,

부끄러움,

그리고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원망.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너 정도면 잘 살고 있잖아.”

“그냥 중년의 불안이야, 누구나 겪는.”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나는 그저 매번,

벼랑 끝에 매달려 버둥거려 왔을 뿐이라는 것을.




결국,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평생 나 자신을 외면해왔다.


“그래도 열심히 살았으니까”라는 말 뒤에,

울고 있던 아이를 숨겨두었다.


“다 지난 일이니까”라는 말 아래,

곪아 터진 상처를 묻어두었다.


그렇게 숨겨두고 묻어둔 것들이,

이제 하나씩 내 앞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거울 속에,

아주 오랫동안 길을 잃었던 내가 조용히 서 있었다.




때로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때로는 가슴 깊은 곳의 말들을

종이비행기처럼 접어,

전하지 못한 채 허공에 날려 보냈다.


홍역처럼,

혹은 첫사랑처럼 지독한 감정의 폭풍이 지나간 뒤에야,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의 젖은 머리칼에서 나는 샴푸 냄새.


고단한 하루 끝, 아내의 지친 눈빛.


햇볕에 잘 말라 빳빳해진 수건의 감촉과,

가지런히 개어져 있는 아이들의 속옷.


그런 것들이

예전보다 훨씬 또렷한 이미지로

가슴 깊이 박혀 들어왔다.




나의 두 번째 인생은,

무언가 멋지게 시작하는 일이 아니다.


이미 내 안에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을,

비로소 알아채는 시간이다.


가장 아팠던 순간도,

후회로 가득했던 선택도,

모두 나의 일부였음을 끌어안는 과정이다.




여전히 나는 부족하고, 어리석고, 두렵다.


하지만 이제는 나 자신에게 말해줄 수 있다.


조금은 느려져도 괜찮다고.

진심을 다해 ‘나’로 살아가고 싶다고.


나는,

아주 길고 불안했던 어제의 호흡을 지나,

비로소 거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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