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

두 번째 삶

by 준희최

허공에 머물던 시선

웃음 뒤에 굳게 다물어지는 입술


숨가쁘게 달려온 시간 뒤에,

가장 큰 행복 뒤에,

미쳐 열어보지 못한 문이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 문을 여는 단어를 발견했다.




“뭘 그렇게 생각해?”


아내의 목소리가, 나를 심해로부터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두 딸의 긴 머리를 말려주는 저녁 시간.

나는 종종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 나 혼자만의 깊고 차가운 바다로 가라앉곤 했다.


“요즘 계속 그러는 거 같아서. 무슨 일 있어?”


“아니, 애들이 너무 예쁘잖아. 나도 저럴 때가 있었나 싶어서….”


나도 저랬을까.

천진난만하게 웃고, 아빠에게 몸을 던지고, 끝없는 질문을 쏟아내던 때가.

내가 내 아이에게 짓는 이 다정한 표정을,

과연 나의 부모님에게서 본 적이 있었던가.


끝없는 질문의 꼬리는,

어느새 무거운 닻이 되어 나를 과거의 심해로 끌어내렸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말이 없어지고 침울해졌다.




그날 저녁, 나의 표정을 살피던 첫째가 물었다.


“왜? 아빠는 어렸을 때 안 예뻤어?”


아이의 순수한 질문이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아니야, 아빠도 너처럼 예뻤지.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이 사랑해주셨어.”


나는 가까스로 웃으며 대답했지만,

목소리는 거짓말처럼 떨려 나왔다.

머릿속에는 두꺼운 벽 뒤에 서 있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너는 꼭 너 같은 자식을 낳아보라”던 악담.

매서운 눈빛과 무거운 공기.

어린 뺨에 닿았던, 지워지지 않는 손바닥의 감각.




그때였다.


별것도 아닌 장난감 하나를 두고, 아이들이 악을 쓰며 싸우기 시작했다.

그 울음소리가, 내 안의 낡은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그만 안 해!”


벼락같은 고함과 함께, 내 안의 무언가가 폭발했다.

순식간에 얼어붙은 아이들을 각자의 방으로 돌려보냈다.


거실에는 싸늘한 침묵만이 남았다.




아이들이 잠자리에 드는 시간.

나는 아이들의 볼에 입을 맞추고,

아빠의 갑작스러운 분노를 서툴게 사과했다.


방문을 닫고 나오자, 아내가 거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조용히 곁에 앉아 가만히 나와 눈을 맞추었다.


“오빠, 아까는 애들한테 너무 심했던 것 같아.”

“……”

“아까 아이들한테 화내는 거… 꼭 예전의 오빠 아버님 모습 같아서, 나 좀 무서웠어.”


아내의 그 말에,

오랫동안 닫혀 있던 댐의 수문이 터져버렸다.




나는 처음으로 이야기했다.

이유 없이 뺨을 맞았던 어린 날에 대해.

아버지의 저주 같았던 악담에 대해.

그리고 오늘, 그 저주가 현실이 될까 봐 얼마나 두려웠는지에 대해.


나의 서툰 고백을, 아내는 담담히 끝까지 들어주었다.

어떤 판단도, 섣부른 위로도 없이,

그저 나의 이야기를 길어 올렸다.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그녀는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애가 뭘 안다고… 너무 불쌍해.”


그 한마디였다.


평생 나를 짓누르던 죄책감과 자기혐오의 무게를

단번에 들어 올려 준 그 한마디.


‘내 탓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




그날 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글을 써볼까 해.

이제 나이도 있고,

뭔가 내가 자유롭게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어.

꼭 은퇴를 위한 그런 게 아니더라도.”


아내는 그러라고 하면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결혼할 때부터 내가 써온 수많은 일기를 보고 놀랐던 그녀였다.

무언가를 쓴다고 해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노트북의 흰 바탕 위에 커서를 놓고,

한참을 망설이다 조용히 썼다.


“두 번째 삶.”


그것은,

아내가 내게 건네준

내 인생의 첫 문장이었다.





작가의 말


나의 서툰 고백을 가만히 들어주던

한 사람의 눈빛 속에서,

나는 내 안에 오랜 시간 닫혀있던 문을 발견했습니다.


‘두 번째 삶’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깜빡이는 커서를 한참이나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그저 어쩐지 쌉싸름한 맛이 나는

이 행복을 가만히 적어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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