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에게 말해주세요

여름 풍경 속 멈춰진 필름

by 준희최

얼굴을 타고 흐르던 끈적한 피와,

등을 떠밀던 아버지의 서늘한 손바닥과,

위로 한마디 없던

길고 뜨거웠던 오후.


그 여름의 길목에,

아직도 혼자 서 있는 아이가 있다.

끝나지 않은 오후를 견디던 아이가 있다.




요즘 우리 집에서 코피는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첫째는 코끝이 찡해지면 알아서 거울 앞에 가고,
둘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휴지를 접어 코에 쑤셔 넣는다.
처음엔 놀랐던 우리도
이제는 “어?” 하는 숨소리 하나면 충분하다.
어떤지 물어볼 새도 없이,

아이들은 스스로 괜찮음을 증명해 보이곤 한다.


그 짧은 순간에도 마음이 찡하다.

그 작고 여린 몸이 피 한 방울에 놀라지 않도록,
그동안 우린 수없이 연습해 왔다.
놀라지 않도록, 무섭지 않도록.
그게 부모라는 이름 아래 우리가 배워온 일이었다.


어느 날은 첫째가 피 묻은 휴지를 들고 나에게 말했다.


“아빠, 괜찮아. 이건 그냥 그래, 원래 이래.”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순간 가슴속 어디선가 울컥하고 무언가 올라왔다.
언제부터였을까.
아이가 도리어 나를 안심시키는 말을 건네기 시작한 때.


그리고 그날,

나는 오래전의, 아주 오래전의 한 장면으로
끌려가듯 되돌아가게 되었다.




열한 살 즈음이었을 거다.
가족과 함께 차를 타고 낯선 동네를 지나던 어느 날, 코피가 났다.
나는 그게 뭔지도 몰라 손등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입가에 닿은 끈적함이 이상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창밖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그 눈길의 방향을 더듬었다.


차에서 내린 뒤, 아버지의 눈빛이 날 꿰뚫었다.

“병*새끼…”

말끝을 흐리며 돌아선 아버지는,

“어휴, 덜떨어져가지구 어디서 저런 게 나왔어.”

들으라는 듯한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는 나를 뒤로 둔 채 저만치 걸어가 버렸다.


엄마는 놀라서 소매로 내 얼굴을 닦으려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날카롭게 외쳤다.


“야!! 그걸로 왜 닦아! 피 묻으면 안 지워지는데!”


엄마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그녀는,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손으로 가려. 가리고 따라가....”


엄마는 아버지 한걸음 뒤로 따라붙었다.


그 골목은 나에게 처음 걷는 낯선 곳이었다.
나는 두 손으로 코와 입을 감싸고 아버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제야 갈색으로 얼룩진 손등이 보였고,
차창 밖 사람들의 표정이 나를 스쳐갔다.


앞서 걷는 엄마아빠의 거리는
멀어졌다가도,
좁아졌다가도 한다.


걸음이 바쁘다.
왜 나는 코피가 나고 그러지.
아이는 스스로를 탓한다.
그저 속상해, 속상해하며
복잡한 마음을 꼬집을 뿐이다.
늦게 따라가면 아빠가 또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아이는 고개를 돌려 쇼윈도를 바라본다.
몸을 웅크리고 종종걸음으로 걷고 있는
열한 살짜리 아이가 거기 있다.




나는 지금,
그 쇼윈도 너머에서 그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구부정하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 아이는
아직도 길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을지 모른다.


그날 나는,
무심한 말보다 오래 남는 것이 있다는 걸 처음 배웠다.

한 아이가 혼자 얼굴을 감싸 쥐고 걷던 여름의 길목엔
아무 말도, 체온도 없이 남겨진 시간이 있었고
그 여백은 세월이 흘러도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더 조심스러워지는 건,
언젠가 내 말 한마디, 시선 하나, 손짓 하나가
그들의 마음속을 오래 떠돌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날의 나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누군가의 여름이 피처럼 번질 수 있다는 걸.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아이에게 다가간다.
얼룩진 얼굴을 조심스레 소매로 닦아주고,
놀란 눈동자에 입을 맞추듯 다정하게 말한다.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나는 여전히 쇼윈도 너머에 선 그 아이를 떠올린다.

여름의 한낮에 얼룩진 얼굴,

그 뒷모습이 아직 내 안에 멈춰있다.






작가의 말


내 안에는,

상처받은 채로 어른이 되지 못한

한 명의 아이가 살고 있습니다.


아파도 아픔을 모른 척하고,

도움이 필요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아이


그 소년은 여름의 오후에서,

오래 홀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오늘, 그 아이에게

아주 늦은 사과와 위로를 건넸습니다.


그 작은 어깨를 감싸며

멈춰 있던 여름을 이제야 함께 지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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