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인류연재

마음에 드는 칼

by 준혜이

아주 잘 드는 칼을 샀다. 지금까지 쓰던 칼은 오타와에서 남편이랑 장을 보다 대충 골라서 산 것이었다. 결혼한 지 얼마되지 않은 그 때 우리 부엌 살림에는 쓸만한 칼이 없었다.


우리가 고른 칼은 무겁고 잘 들지 않았다. 집을 사면 바꾸고 싶은 나의 살림 목록에 가볍고 잘 드는 칼 세트가 있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내가 떠나고 싶어질 때까지 살 집에 광고 책자에 나오는 살림살이를 들여놓고 사는 상상 속에는 사람이 없어야 완벽하다는 문제가 있다.


남편이 인터넷 검색을 하더니 칼을 세트로 사는 것 보다 필요한 것 몇 개만 따로 사는 게 좋다고 한다.


나는 오래된 칼을 버려버리고 새 칼로 파를 썰다 왼손 넷째 손가락 끝 살점을 잘랐다. 아프기보다 먼저 피를 보고 놀랐다. 새끼 손톱만한 살점이 도마 위에 하얗게 놓여 있었다. 왠만하면 병원에 잘 가지 않는 나인데 피가 쉽게 멈추지 않아 겁을 먹고 병원에 갔다. 병원에서 손가락을 소독하고,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고 주사까지 맞고 왔다.


새로 산 칼로 생고기를 쉽게 손질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장고 양배추, 양파, 애호박, 부추, 상추, 버섯을 모조리 아주 잘게 썰고 싶었다. 빨간 구두를 신고 멈출 수 없는 춤을 괴롭게 추는 아가씨처럼 나는 마음 속으로 칼질을 계속했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 것에 나를 건다. 좋은 것이 나쁘다. 다친 손가락이 욱씬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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