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인류연재

항상 엔진을 켜둘게

by 준혜이

우리집에 다섯 아이가 있다. 그 중에 내 딸아이만 여자다. 누군가의 남자친구, 남편, 아빠의 과거가 내 앞에 철없이 펼쳐진다. 나는 여자의 과거보다 남자의 과거가 더 용서받기 힘들다고 본다.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아이들을 봐 줄 수 있는 사람이 가까이 산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다. 나는 이웃의 불행 중 다행이 되어 아이들이 북적이는 오후 시간을 보낸다. 여태껏 스스로를 이방인 취급하며 마음으로도 이곳저곳을 떠돌던 나는 사실 오래된 이민자였다. 가족도, 친척도, 베이비시터도 아닌 누군가와 도움을 주고 받으며 살아왔다.


나에게 나로, 나의 가족으로, 내 생활로 오염되지 않은 착한 마음이 있었다면 이웃집이 도움을 청하기 전에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선의와 이기로 복잡한 나의 내면과 달리 아이들은 잘 있다.


오늘 딸아이 미술 수업은 가지 않기로 했다. 내가 부탁하면 딸아이를 미술 수업에 데려가 줄 사람이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오늘의 긴급 상황을 내 손에서 끝내고 싶고, 딸아이가 내 눈 앞에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도움이 되는 건 좋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게 편하지 않은 건 우리 생활에 힘든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의 습관일 뿐이다.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가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스스로를 위하지 않고 살 것인가, 하는 물음에 가닿았다. 그러자 악마와 같은 진심이 머릿속을 잠시 스쳐지나가고 나는 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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