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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Dear Diary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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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혜이 Sep 17. 2020

내 고향 서울엔

검정치마

 요리, 할 수 있지만 하기 싫고 꼭 해야만 하는 일.  밥을 할 때마다 일을 벌이는 느낌이 좋지 않다.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고, 그걸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질을 하거나 껍질을 벗기거나 하는 이런 준비 과정이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한 곳을 향해있다는 은 마음에 들지만.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는 소리, 식재료에 칼 들어가는 소리, 도마 소리, 비닐 벗기는 소리, 쓰레기통 열었다 닫는 소리, 물소리, 불 소리, 부엌 바닥에 슬리퍼 끄는 소리. 요리하는 중간중간 서로 다른 여러 소리를 듣는 것도 마음에 들긴 하지만 밥을 하러 부엌에 들어갈 때마다 왠지 어깨를 바닥으로 축 늘어뜨리고 싶어 진다. 아무래도 요리보다는 뒷정리가 내 적성에 맞는다. 시작해서 끝내는 것보다 끝난 곳에서 시작해서 끝을 보는 것.

 오랜만에 미역국을 끓여본다. 빨간 도마 위에 소고기를 올려놓고 초록색 칼로 자른다. 생고기 감촉이 너무 싫어서 고기를 썰다 말고 아주 뜨거운 물로 손을 여러 번 씻는다. 고기 잘리는 소리가 듣기 싫어 헤드폰을 끼고 검정치마의 “내 고향 서울엔”을 반복해서 듣는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서울을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살지는 않았다. 소고기를 냄비에 넣고 참기름에 볶는다. 참기름을 너무 많이 부었다. 서울에서 살았던 군인 아파트가 생각난다. 유치원 다녀오는 길에 나를 불러 세우던 경비 아저씨, 아저씨가 아니라 이십 대 초반의 군인이었겠지만 나에게 친절했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 날도 있어서 유치원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혹시 오늘은, 하는 마음이었다. 그랬을 것 같다.

 물에 불린 미역을 냄비에 넣고 간장은 쏟으면 안 되니까 조심히 넣어서 소고기랑 같이 볶다가 물을 부었다. 그리고 가스불을 최대로 높였다. 얼마 전에 고등학교 친구에게 싸이월드에 내가 써놓았던 일기를 힘들게 백업해놓았다고 이야기했다. 그 친구를 만나고 온 날 써놓은 일기가 몇 개 있다고 했더니 심심할 때 하나씩 이메일로 보내달라고 했다. 우리는 같은 동네에 살면서 자주 서울에서 만났다. 서울로 대학을 다녔으니까 당연한 일이었지만. “발 디딜 틈 없는 명동 거리로” (내 고향 서울엔, 검정치마) 친구와 놀러 다니면 고등학생이면서 대학생인 척하고 있는 그런 기분에 더 들떴던 것 같기도 하다. 가스불을 줄이고, 냄비 뚜껑을 닫고, 부엌 밖으로 나간다.

 거실에 참기름 냄새가 진동한다. 발코니 문을 활짝 연다. 어젯밤에 두꺼운 이불 두 개를 겹쳐 덮으며 알았지만 여름이 끝났다. 서울에 가고 싶다. 대학 생활을 시작해서 끝내지 못한 곳. 끝난 인연이 그 끝에서 다시 시작될지도 모른다고 믿었던 그곳. 요리하기 싫은 이유가 또 한 가지 생각났다. 냄새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척할 수가 없다는 점.

 “내 고향 서울엔 아직 눈이 와요 얼었던 내 마음도 열 틈 없이 내 사랑 서울엔 아직 눈이 와요 쌓여도 난 그대로 둘 거예요 쌓여도 난 그대로 둘 거예요” (내 고향 서울엔, 검정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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