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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Dear Diary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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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혜이 Oct 16. 2020

미저리

2005.04.02 00:00  

   

   사랑에 빠진 어느 사진작가가 한 편의 시를 지어 발표한다. "그동안 저와 사랑했던 여성분들, 죄송합니다. 제가 드디어 첫사랑을 만났습니다." 나는 잠시 머릿속이 엉켜버렸다. 내가 그의 과거 연인이었던 것도 아닌데 마음이 아팠다. 사람들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조금씩 잔인해져 가는 모양이다.

   

   사람과 맺은 관계의 끝을 인정하기란 내게 익숙지 않은 일이다. 대신, 나에게는 언제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환상이 존재한다. 훗날 사랑에 빠진 나는 아마 이런 시를 지을 것이다. "지금 저와 사랑하는 남성분, 죄송합니다. 저는 지나간 사람들에게서 끝까지 못 벗어나요."


2005. 04.10 00:00


   『이건 꼭 돌려줘야 할 것 같아. 내가 억지로 뺏은 거나 다름없던 거니까. 잘 간직했다가 돌려주고 싶었어. 그래서 지금 이렇게 소포로 보내.』

  

   친구는 내 얘기를 차분히 듣고 나서는 "야! 차라리 다시 만나자고 해!!"라고 말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너에게 그 어떤 포즈도 취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웃음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쩌다가 나는 이렇게 오래도록.


2020.10.15 03:03

   

   눈썹에 두 개, 입술에 하나. 남자 친구는 피어싱을 하고 다녔다. 우리는 헤어졌지만 가끔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지냈다. 헤어진 남자 친구가 입대를 앞두고 있던 무렵, 피어싱은 어떻게 할 거냐고 내가 물었다. 그냥 빼놓고 간다길래, 나한테 주고 가라고 막무가내로 졸랐다. 나는 그걸 죽은 우리 관계의 유품이라 생각하고 내 방에 잘 묻어두었다. 피어싱을 눈썹에 하나만 해볼까, 하다가 말았다. 아플까 봐 무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연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 헤어진 연인과 비슷한 모습으로 서서히 변해가는 여자가 주인공인 호러 영화를 언젠가 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지나간 사람들에게서 못 벗어날 거라더니 정말로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되었다. 한마디로 결혼 전 나의 모든 연애는 성장기에 잘못 먹은 보약 같은 연애였다고  수 있다. 내가 바라는 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와 상관없는 곳에서, 나를 좋아하는 상태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인해 행복해진다면 좋을 텐데. 나를 좋아하는 상태로.” (꿈과 결, 사이하테 타히) 그러면 내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이다.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 너와 상관없는 곳에서, 너를 좋아하는 상태로, 네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행복해. 너를 좋아하는 상태로.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나더러 주성치를 닮았다고 한 오빠가 자꾸 좋아져서 나는 헤어진 남자 친구의 피어싱을 손에 꽉 쥐고 나가 아파트 단지 화단에 던졌다. 뒤도 안 돌아보고 집에 들어가려고 그랬는데 어느샌가 나는 쭈그리고 앉아서 피어싱을 주워 땅에 묻고 있었다. 나는 그 땅을 영원히 떠나버렸지만, 그렇다고 그게 끝은 아니었다.


2005.09.13 00:22


상처는 결국,

그 흔적을 찾기 어렵도록 아물고 만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심장에 구멍을 뚫어 장식하는 일.

사랑하는 둘을 포함한

타인들의 이해를 얻기는 쉽지 않고

잔인하지만 만족스러워 포기할 수 없는 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반대편 심장에 구멍을 뚫어 장식할

나의 사랑이,

아무는 날은 오지 않았으면.


심장에 피어싱

피어싱이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상처

나도 모르게 아물어버린 심장에

또 다른 피어싱.


내 심장에 피어싱

빠져나간 피어싱에 남겨진 상처

심장은 어느새 아물어버리고

남은 건 중독.


  이로부터 정확히 3년 뒤 9월 13일, 나는 캐나다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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