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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Dear Diary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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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혜이 Oct 15. 2020

술, 술.

2004. 5. 30 00:00
   
   한동안 심심함에 못 견뎌하다가 술에 취하면 재밌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알아버렸다.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무리하게 마신 술은 내 머릿속을 간질여 웃게 하면서도 고통스럽게 했다.

   수업 종강 파티라는 생전 처음 가져보는 교수와의 술자리. 같은 수업을 듣는 사람들과의 술자리. 이때 무리하게 마신 술은 내 입을 다물어지지 않게 해 쉴 새 없이 떠들고 장난치게 했다. 또 친구의 술잔을 향한 멈추지 않는 나의 손은 친구를 취하게 만들었다. 미안하다.


   술에 취해 심심하지 않은 월요일, 화요일이었다.

   앞으로 술은 취하도록 마시면 안 될 것 같다. 술 이길 사람 없다고 해놓고 내가 술을 이겨보려고 했다.

 
2020. 10.14 12:00

   최근 몇 년간 뉴스로 보는 한국은 여자가 생활하기 위험한 곳이 되어버린 것 같다. 친구들은 여전히 별 탈없이 잘 지낸다고 하지만 막상 직접 만나 얘기해보면 다른 이야기를 꺼내 놓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우리가 같이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하다가 그때는 여성 대상 범죄가 지금처럼 드러나지 못했을 뿐, 언제 어디서나 여자는 안전하지 않다. 그게 아니라면 아이의 모습을 점점 벗어가는 딸아이를 지켜보는 내 불안한 마음이 문제이거나.  

    학교 근처 호프집에서, 친구와 나는 강의실에서와 마찬가지로 교수의 눈에 띄지 않을 만한 자리에 앉아 소주를 마셨다. 맥주도 마셨다. 교수라고는 했지만 그는 외부 강사였다. 호프집에 있던 모두가 조금씩 각자 알아서 술에 취해갔다. 말소리, 웃음소리, 음악 소리가 한데 모여 와글와글, 술자리는 시끄러웠다. 술에 취한 교수는 술 취한 어떤 언니의 두 손을 붙잡고 외롭다, 외로워, 술주정을 했다. 강의실에서는 볼 수 없던 다정한 모습이었다. 갑자기 술 취한 오빠 두 명이 나타나 술에 취한 교수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그는 술자리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 오빠들 중 한 명도 결국에는 술에 더 취해, 술에 취해 계단에 앉아있던 나와 내 친구 사이를 미끄럼 타듯이 타고 내려갔다. 모두가 서로 다시 보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계단에서 굴렀으니 내일 온몸이 쑤실 거라는 말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술에 취해 주저앉아 있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젊은 남자의 손을 잡고 외로워, 외롭다, 술주정하는 나를 그려본다. 나는 여자니까 남자 허벅지까지는 손을 대야 끌려나가겠지, 라는 생각을 한다. 아니, 이런 쓰레기가. 아들이 살아갈 세상도 안전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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