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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혜이 Dec 15. 2021

가전과 궁상

   이사 오고 얼마 되지 않아 식기세척기가 고장 났다. 청소기와 전자레인지 말고 가전제품을 사본 경험이 없는 나는 긴장했다. 이 기회에 최신 식기세척기를, LG나 삼성 K-가전을 마련하는 거야! 떨리는 마음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다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나는 새로 식기세척기를 들이는 건 다음으로 미루어야겠다고 결심한다. 세상에 이렇게나 다양한 식기세척기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나는 도저히 그중에 하나만 선택할 자신이 없었다. 스마트폰을 붙잡고 언니 식기세척기 뭐가 좋아요?라는 문장을 적을 수도 있었지만 순간 뉴저지를 떠나기 전에 괜히 혼자 번 해본 생각이 떠올랐지. 이제 내가 언니야.

  고장 난 식기세척기의 문제는 시작 버튼이 눌러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러면 스위치 보드를 바꾸면 되겠네, 하면서 나는 식기세척기 브랜드와 제품번호로 인터넷 검색을 해 식기세척기 부품을 찾았다. $150. 이러면 돈을 좀 더 들여서 식기세척기를 사고 우리는 평생 한 부엌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해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 안에 생생히 남아있는 이삿날의 기억 때문인지 아저씨들이 커다란 식기세척기를 힘겹게 들고 우리 집에 쳐들어와서 고장 난 식기세척기를 들어내고 새로운 식기세척기를 설치하고 그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나를 생각하니 당장 결제. 부품이 하루빨리 집으로 배송되어 우리 집에 놀러 올 뉴저지 언니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할 수 있길 바랄 뿐. 네가 하면 되잖아 설거지. 언니들의 몸과 마음은 늘 나보다 한 발 빠른 걸.

   유튜브로 식기세척기 부품 교체 영상을 보았다. 제품 사용설명서와 요리 레시피를 향한 저항 정신으로 무장한 혁명적 나날이 이리 끝나버리는 건가 해서 영상에 집중할 수 없었다. 식기세척기와 150불과 뉴저지 언니들의 방문이 내게 이토록 중요했나, 설명과 지시 따윈 필요 없어 객기 부리던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갔냐. 나의 고뇌와 상관없이 유튜브 속 머리 하얀 할아버지는 한없이 다정하고 정말 이거 별 거 아니네요, 대답하고 싶게 무용하듯 부품을 척척 갈고 계셨다. 결국 나는 이 영상을 세 번이나 보았다. 평소와는 다른 내 모습이 불편한 남편은 말했다. 그냥 하나 사라. 싫어.

  식기세척기 부품 도착과 동시에 나는 클래지콰이 노래로 귀를 막고 식기세척기 전기 차단 스위치를 내렸다. 유튜브 영상 속의 할아버지가 부품 교체 전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그거라고 알려주긴 했지만 그 얘기를 듣지 않았어도 그렇게 했을 거야, 상식적으로 나는 전기 올라 죽고 싶지 않은 사람이니까 껄껄껄. 내 허리 높이까지 오는 길고 좁은 박스를 열어 식기세척기 스위치보드를 꺼냈다. 새하얀 종이에 까만 문장들이 그림과 함께 가득한 설명서가 스위치보드 옆에 붙어 딸려 나왔지만 나는 그걸 바로 집어 들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 재미없는 잔소리 꺼져, 하는 심정이랄까. 스위치보드를 몽둥이처럼 오른손에 들고 나는 식기세척기 앞에 섰다. 젠틀 레인 이즈 커밍 다운 (Gentle rain, 클래지콰이)

   식기세척기 문을 열고 문 뒷면의 나사를 하나하나 공들여 풀었다. 나사 길이가 긴 게 있고 짧은 게 있었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겠지만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나는 긴 나사가 들어갈 구멍과 짧은 나사가 들어갈 구멍의 자리를 외우고 페이퍼 타월 위에 나사를 나란히 뉘었다. 고장 난 스위치보드 연결선을 빼고 새로운 스위치보드를 연결했다. 마치 시한폭탄 제거를 하는 듯한 기분으로 아주 오랜만에 진지한 활동을 하고 있는 내가 자랑스러워 드디어 적성을 찾았다고까지 생각했지만 긴 나사를 기다리는 구멍 속을 헛도는 짧은 나사를 빼내며 좌절했다. 날 울리는 널 버리는 슬픈 얘긴 하지 마요 우리 둘이 홀로 아름답도록  (Romeo n Juliet, 클래지콰이)

   한 번도 고장 난 적 없었던 것처럼 작동하는 식기세척기 앞에 서서 150불로 1000불을 아낀 것일까, 그냥 150불을 낭비한 걸까 궁상을 떨며 불안해하며 여러 날을 보내다 드디어 뉴저지 언니들 영접. 설거지가 아니어도 언니들은 물에 두 손을 담그며 밥을 했다. 네가 하면 되잖아. 언니들이 비키랬어. 언니들은 요리 레시피가, 제품 사용설명서도 아니라 내가 감히 쉽게 거역할 수 없느니라.

   두 달 뒤, 문 닫힌 식기세척기에서 줄줄 새어 나온 물이 우리 집 부엌을 한강으로 만들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그랬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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