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시선이 닿는 거의 모든 벽에는 가족들의 사진이 붙어있다. 예전에 할머니가 혼자 지내시던 노인 아파트에 놀러 갔다 오면 꼭 박물관에 다녀온 기분이 들곤 했는데 그때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인생에서 먼저 떠나버린, 마지막까지 곁에 있어줄 사람들의 얼굴을 다시 한 공간에 전시된 사진으로 구경하고 있자니 지나간 시간 속을 산책하는 느낌이다. 할머니가 낳고 기른 자식들의 흑백 사진에서 우리 아이들의 사진까지, 우리가 만난 여기 지금 이 순간이 이루어지기 위해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있어야 한, 계속되어야 할 모두의 삶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본다.
우리의 전화를 받고 아이들이 차 밖으로 나와 창문 앞에 선 할머니가 잘 볼 수 있도록 춤을 추며 인사했다. 둘째가 크록스를 신고 아스팔트 위로 녹아내린 눈 위에서 춤을 추는 바람에 아이의 양말이 다 젖어버렸다. 그렇게 아이들은 발이 시려 유리창 안에서 금세 퇴장. 춤추는 둘째를 보고 함께 춤을 추는 할머니 뒤에 서서 나도 공중에 두 팔을 막 휘저으면서 웃었는데 남편과 시아버지는 이 상황이 안타깝기만 한 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내 시야에 잡히지도 않았다. 이 가족의 테두리 안팎에서 나만이 어떤 거리를 유지하며 마음이 내키면 더 가까이, 내키지 않으면 더 멀리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모양이다.
이인용 소파에 홀로 앉은 할머니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시어머니가 챙겨주신 쇼핑백에서 핫핑크색 털모자를 꺼내고 귤도 꺼내드렸다. 대화가 시작되고얼마 동안은 내게서 한 시도 시선을 거두지 않으시는 할머니와 두 눈을 끊김 없이맞춘 채로 말을 해야 했는데 문득 모든 것이 사그라드는 육체 가운데 기운 넘치게 빛나는 저 눈빛이 무슨 의미인지 파헤치고싶어 진다. 우리 사이에 놓인 식탁 위의 털모자를 두 손으로 들고 할머니가 이건 뭐야? 털모자예요. (할머니는 털모자를 시간 들여 머리에 쓰고 침대 위에 앉아있는 아들을 바라본다.) 나 예뻐? 네. (털모자를 벗어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는지 내가 묻자 할머니는 외롭고 쓸쓸한 게 문제라고 또박또박 대답하셨다. 이건 뭐야? 털모자예요. (할머니가 털모자를 천천히 머리에 쓰고 아들을 바라본다. 털모자를 벗어 식탁 위에 내려놓는다.) 너 얼굴 좋아졌다? 너 살 좀 쪘네? 네, 요즘 잘 먹고 잘 자요. 할머니는 어떠세요? 이건 뭐야? 털모자예요. (할머니는 털모자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만지작거리다 소파 옆 작은 테이블 위 전화기 옆에 내려놓는다.) 처음 본 핫핑크 털모자가 5분 이상 머물 수 없는 기억 아래 지속되는 나의 존재. 할머니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할머니 저 이제 한국 나이로 마흔 돼요!!!! 뭐??????? 할머니를 깜짝 놀라게 한다.
(아들을 바라보며) 너 누구야? 너 누구야? 우리는 할머니의 표정을 살피며 할머니가 기억을 다루는데 서툴러진 자신의 처지를 이용해 우리에게 짓궂은 농담을 건네는 걸 알고자연스럽게 웃어넘겼다. 전에 시아버지가 말해주셨는데 알츠하이머 증상을 늦추는 약이 있긴 하지만 그 약의 부작용이 수명 단축이란다. 그 말에내가부모가 자식을 대신해 내려줄 수밖에 없는 선택과 자식이 부모를 대신해서 내려야만 하는 선택이 우리의 시작과 끝이라는 생각에 빠져 아 씨 X, X 같네,라고 속으로 욕을 하진 않았다.
어제 집 앞에서 산책을 하다가 할머니가 시아버지에게 너 누구야? 하고 묻는 게 할머니가 아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애정표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우리 애들한테 시시때때로 넌 누구냐? 묻고 기다렸다 엄마 딸, 엄마 아들, 하는 대답을 아이들에게서 듣고 감탄하며 어떻게 네가 내 딸이야! 아들이야! 를 쉴 새 없이 외치던 대화가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스스럼없이 할머니와 수다를 떠는 내게 감명받은 남편이 네가 장인, 장모님이랑도 나중에 그렇게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는지 궁금해졌어, 하던 말도 떠올랐는데 나도 할머니와 함께 있는 그 시간 동안 엄마, 아빠 생각이 나지 않은 게 아니라 그렇다, 아니다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정답은 바로 네가 하면 되잖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