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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혜이 Dec 18. 2021

겨울, 스피드

   우리의 시간을 낭비하더라도 나의 운전 실력을 불신하는 동선을 짠다. 4시 45분부터 5시 15분까지 둘째가 피아노 학원에서 선생님 옆에 앉아 피아노를 두드리는 동안 첫째와 나는 학원 대기실 의자에 앉아 각자의 독서를 이어나간다. 6시에 아이들 코로나 백신 2차 접종 예약이 있어 첫째는 오늘 태권도 수업에 갈 수 없다. 피아노 학원에서 약국까지는 고속도로를 타면 25분, 고속도로를 피해 가면 29분이 걸린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동네, 깜깜한 겨울밤, 고속도로는 생각만 해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조합이다. 약국에 빨리 도착하는 것이, 목적지를 향해 재빨리 달려가는 게 내 운전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목표는 생존, 29분의 평화, 노래 한 곡을 더 들을 수 있는 여유, 해가 이르게 지는 겨울의 고속도로에서는 누릴 수 없는 낭만. 시속 100km를 넘나들며 달리는 자동차 운전 아직도 무서워.    

  엄마, 나 화장실 가야 돼, 코로나 2차 접종보다 나를 더 걱정시키는 딸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화장실 없는데. 그래서 딸아이는 어쩔 수 없이 약국 건물 뒤 깜깜한 숲 속으로 숨어 들어가 그만 노상방뇨를. 노상방뇨 경험이 별로 없는 딸아이는 나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나도 나름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딸아이는 더하네. 아이의 손을 잡고 화장실을 찾아 헤매던 수많은 순간들이 재난 영화처럼 내 머릿속에 펼쳐지나 갔다. 자부심을 느꼈다. 어떤 엄마는 간이 화장실을 차에 싣고 다닌다던데. 육아는 임기응변의 예술이야. 둘째의 소변을 빈 플라스틱 물통에 받다가 남성의 오조준을 오므린 내 한 손바닥으로 받아낸 일도 있었다고. 아이의 똥과 오줌에 대한 경이, 무감각, 독립이야말로 육아의 완성으로 가는 길인 걸까요.

  아이들이 주사를 맞고 밤에 혹시 아플지 몰라 타이레놀을 하나 사고 약국에서 주차장으로 나갔다. 집에 가는 길은 고속도로를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저녁 6시 30분에는 교통체증이 있다. 차들이 줄지어 기어가는 고속도로를 고속도로라고 할 수 있나. 내 뒤에 앉은 둘째가 외친다. 엄마, 고속도로야! 괜찮아, 저기 차 막히는 걸 좀 보렴.

   내가 스무 살부터 운전을 했다면 지금쯤 싱어게인에 나가서 노래하는 가수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것 봐, 나를 한 번 쳐다봐 나 지금 이쁘다고 말해봐 (핑클, 내 남자 친구에게)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나의 노래를 듣고 자랐으나 한국말이 서툴러 가사를 제대로 이해할 순 없을 것이다. 이런 노래를 부르며 자란 나와 This is my fight song Take back my life song Prove I'm alright song My power's turned on (Rachel Platten, Fight song) 이런 노래를 좋아하면서 갈등이 생길 때마다 내게 한마디도 지지 않겠다며 이를 악물고 맞서는 딸아이는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다른 여자인 것일까. 두 여자 사이에서 헤이 구글 엄정화 엔딩 크레딧, 하면서 날이 갈수록 찌질한 남자가 되어가는 것만 같은 둘째는 또 어쩐 일인가.  

  유튜브 뮤직을 틀어 핑클 노래 모음을 약 32분간 따라 부르며 운전하는 사이 집에 도착했다. 여전히 외우고 있는 노래 가사가 많아 나에게서 어떤 정의 내릴 수 없는 희망을 느꼈고, 루비는 명곡인데 가사가 쓰레기네. 남편이 바람피우면 한 번은 봐줄 수도 있겠다는 마음은 노래방에서 교복 입고 루비를 부르면서부터 키워온 게 분명하다. 오늘 그녀를 만났어. 너의 새로운 여자를 (핑클, 루비) 난 참 야만적인 온실 속의 잡초로 다수의 노상방뇨를 저지르며 살았군요.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걱정했잖아.
고, 고, 고속도로를 탔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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