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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혜이 Dec 22. 2021

만보

   요가 소년에게 배워, 외운, 몇 가지 요가 동작만으로는 노화 현상과 비슷한 운동 부족 증상을 극복할 수 없다. 근육이 필요해. 그래야 엉덩이 통증 없이 아주 오랜 시간을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매일 만보를 걷는, 머릿속을 머뭇거리는 생각이었다가 드디어 그러기로 결심한다. 우선 마음속으로 매일 똑같은 양말을 신고, 신발을 신고 집 앞에 우뚝 선 소나무 곁을 뱅뱅도는 산책을, 일주일간, 소파에 엎드려서, 누워서, 싱크대 앞에 서서, 무중력 상태로 기울인 마사지 의자에 앉아, 상상했다. 피곤해.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은 채로 양말을 신고, 운동화를 신고, 외투와 목도리를 몸에 두르고 이어폰과 스마트폰을 챙겨서 밖으로 나섰다. 집에 들어가고 싶냐? 집이 어딘데?


   우리에 갇힌 호랑이가 같은 자리를 반복해서 어슬렁거리는 것과 다름없는 내 산책의 배경음악은 싸이. 귀 기울여 듣다 보면 그의 사랑 노래에 감동을 받기도 한다. 한 바퀴. 롸잇 나우 뮤직비디오에 이촌역이 나왔던 것 같은데. (아니, 한남역) 그래서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지하철 노선표를 한 번 외워보았다. 신도림에서 우르르, 용산에서 우르르. 그때 위에서 전철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면 전철이 사람들을 먹고 토하는 것처럼 보였을 텐데. 두 바퀴.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정수리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가 왜 볼 것인가. 세 바퀴. 12월이다. 2021년이 끝나간다. 올해도 어김없이 실재하지 않는 어딘가를, 누군가를, 그리며 상사병에 걸린 사람 같은 간절한 마음으로,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뉴 이어. 다섯 바퀴. 나는 오직 손목에 채워진 핏빗의 진동을 목표로 걷고 있다. 만 번째 발걸음을 지금 막 떼셨습니다, 지이이잉. 그의 떨리는 안내에도 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이란. 그렇게 나는 한 시간을 걸었다.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으며, 나의 집은 시간이고, 기억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아직까지 흡연자로 살아본 적은 없지만, 이럴 땐, 왠지, 담배 연기를 한숨과 함께 온 집 안에 뿜고 싶어.


    내일 산책의 배경음악은 이별택시.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내려, 이 새끼야. 깔깔깔, 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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