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월요일이, 아무리 역사적으로, 시공간을 초월해, 그 삶의 궤적 자체가 지금까지도 수많은 이들이 세상을 읽어내는 한 관점인, 영향력 있는 사람을 기념하는 날일지라도, 애들이 학교에 갈 필요 없는 공휴일이라면, 악. 그러니까 우리가 중학생 한 분, 초등학생 한 개와 함께 이룩할 집안 세계에서의 투쟁이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원대하고 감동적인 비전에 누를 끼칠 리 없을 정도로 사소하지만 치열한, 식탁 위에 공감각적으로 펼쳐지는 식사 아닌, 마인 크래프트나 유튜브와의 시간 낭비일 뿐이고 해서 겨울 산행을 단행한다.
결코 계단인 척하지 않는 산골짝의 바위에다 눈길을 오롯이 다 쏟아붓는다. 그리고 각자 알아서 안전한 자리를 찾아 한 발짝씩 걸음을 내딛는다. 이런 식으로 한 줄을 이루어 천천히 상승하는 우리 가까이 어느샌가 목줄 없이 자유를 만끽하는 개 한 마리가 나타나, 그를 뒤따르는 제 주인을 외면한 채, 밭은 입김을 내뿜으며 위로, 더 높이 뛰어 올라가는데. 곧이어 우리들 역시 드문드문 두 손으로 바위를 짚어가며 그 개 같이 신나게는 아니지만 실족의 두려움에서 다소 해방된 순간들을 환영합니다.
평소 무의식적으로 해내던 활동이 심혈을 기울여 성취해야 할 목표가 된 여정은 어떤 인간성 안에 뜻하지 않게 정체된 스스로를 벗어나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배신이다. 아니, 이것은 음주를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공휴일, 아이 둘과 두 어른이 산길을 오르며 겪는 심박수의 변화와 세상에 하얗게 내놓는 숨결에 관한 사유다. 하지만 바위와 얼음 위에 발을 신중하게 내려놓거나 위험해 보이는 건 미리 피해 가면서 산을 오르내리는 시간을 더욱 살 떨리게 만드는 취중진담 같은 고백의 메아리가 느닷없이 초등학생의 목소리로 우리를 에워싸고. 엄마, 나 얼마 전에 교장실로 불려 가서 수사를 받았어. 내가 특별히 잘못한 건 없고. 그래서 선생님이 엄마한테 전화도 안 한다고 그랬지. 어느 날 소년의 반친구는 한국말 네가, 가 Nigger와 발음이 비슷하단 사실을 유튜브 쇼츠를 통해 알게 된다. 그가 한국말을 아는 소년에게 그 뜻을 거듭 확인하는 과정을 교실 안 어디선가 누군가 엿듣는다. 그렇게 몰래 화들짝 놀란 자는 선생님한테 달려가 당장 고발. 이봐, 그런 거 우린 벌써 몇 개나 더 알고 있어. 비치 나는 솔로. 쓰빠씨바. 익숙한 소리에 영 일치하지 않는 의미, 속마음과 멀고 다른 기막힌 행동. 그리하여 맨 정신과 불화하는 이 가까운 산중에 고해,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