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배낭을 메고 여행 가방 바퀴를 굴리며 비행기를 차례로 갈아탄 다음 알래스카에 도착할 것이다. 성실한 일상 속에 스마트폰앱이 알려줄, 오로라가 현현할 확률이 아주 높은 어느 밤, 차를 타고 불쑥 퀘벡으로 달려가 밤하늘의 초록빛 장관을 기필코 마주하겠다던 낭만 어린 치기는, 자식들이 부모와 절대 겪고 싶어 하지 않는 무질서라는 걸 깨닫게 되어, 애들 방학에 맞춰 오로라 사냥을 나선다. 우리가 함께 경험하게 될 추위와 허기 속 쉽지 않을 기다림이 여기보다 더 나은 파국이길 기대해. 우리 소유 거의 모든 겨울옷을 챙겨 부지런히 떠난다.
시애틀로 가는 비행기 안, 나의 왼편에 앉아 계신 노신사는 한국분. 그가 스마트폰을 책처럼 펼칠 때 곁눈질을 하다가 화면의 카카오톡앱과 조선일보앱을 보았다. 창가에 앉았으면 바깥이나 내다볼 일이지, 소년은 노신사를 훔쳐보는 나를 지켜보다 내게 그만 좀 쳐다보라 눈치를 준다. 우리의 이런 소란과 무관하게 가방 속에서 킨들과 돋보기안경을 꺼낸 노신사는 독서를 시작하려 한다. 가자미 눈을 하고는 그의 도서 목록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어 답답한데, 대기를 가르는 백색 소음 속에 그가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짚어 드디어 읽기로 작정한 책 제목과 작가 이름만은 똑똑히 보여. Men without Women, Haruki Murakami. 그 순간 우리는 다섯 시간 삼십 분을 이렇게 나란히 앉아서 목적지까지 갈 텐데, 그에게 언제쯤 말을 걸어야 대화 이후가 감당할만할지 고민이 된다.
하루키를 감상하는 그의 내리깔린 눈과 여자 없는 남자들의 문장을 틈틈이 훔쳐보며 나는 가방에서 성경을 꺼내 출애굽기를 읽는다. 출매사추세츠, 우리를 기다리는 광야. 출학교, 너희의 고난 24/7 부모, 와 같은 생각에 빠져들다 그만 수험생처럼 성경에 엎드려 잔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다가온 벼락같은 요의에 잠을 깬 나는, 킨들을 꼭 쥔 노신사의 두 손을 보고, 인상 쓰고 잠든 그의 돋보기 없는 옆얼굴까지 확인한 뒤 절망한다. 그 와중에 그에게 영어로 말해야 하나, 한국말로 할까 결정하기 어려운 채로, 그의 귀환을 간절히 기다리며 아, 화장실.
그가 한국인인 걸 알게 된 이상 존댓말 느낌을 살리기 힘든 영어로 도저히 익스큐즈미, 를 외칠 수는 없어 저, 저기요, 죄송한데 저 화장실 좀, 말끝을 흐린다. 오히려 그가 내게 더 정중하게, 아, 네, 하잖아. 어쩌면 겨우 이 정도만이 내가 그 이후를 감당할 만한 대화의 최선 아닌가. 하지만 이 분은 마치 이번 여행 맨 처음으로 찾아낸 숨은 그림 같아. 그러니까 하루키를 읽는 노인의 존재에, 오, 사랑을 듣고 WTF을 발화하는 남자의 아내로서, 동그라미를 겹겹이 그려야만 죽어서도 후회 없을 것이다.
비행기의 이동과 소음이 잦아들고, 앉아있던 사람들이 제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짐 챙기는 소리를 신호삼아, 저, 저기 읽으시던 책 어떠셨어요, 제가 옆에서 봤는데 무라카미 하루키 책 읽고 계시더라고요, 로 입을 뗀다. 여기, 제 남편이에요,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혹시 무슨 일 하세요?, 그가 뉴욕, 시애틀, 한국을 오고 가는 화가, 사업가라는 사실을, 예술합니다, 알게 된다. 주머니를 뒤져 꺼낸 지갑에서 자신의 명함을 찾아 건네고, 내게 Bound to Violence 읽기를 추천한 다음 홀연히 떠난 그분의 이름을,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네이버 검색해 보니, 그는 은퇴를 몰라 더욱 무르익은 현역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