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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km와 한계

by 준혜이

50km를 완주했다. 레이스가 열리는 공원 주차장을 두 바퀴 돌고, 10마일 코스를 세 바퀴 돌아서, 트레일 레이스와 로드 레이스의 차이를 온몸으로 실감하며.

첫 번째 10마일

출발선에 모인 사람들을 주의 깊게 둘러보다 트레일 레이스 고수의 기운을 뿜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콧수염과 이어진 붉은 턱수염을 배꼽까지 길게 늘어뜨린 그 모습이 꼭, 신화 속 남신 아닌 요정 같으시네요. 다른 주자들이 신은 운동화를 눈여겨보니 그동안 내가 다닌 달리기 대회에선 찾아볼 수 없었던 모델로 형형색색. 누가 보통 러닝화 신고 뛰어도 괜찮다고 그래서, 아니, 그래서 난 망한 걸까, 잠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 출발선은 넘어보자.

사람들 등 뒤를 따라 시선은 주로 땅에 두고 돌과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게 오르락내리락 달린다. 이렇게 주변을 살피지 않는 바람에 달리는 길을 미처 눈으로 익히지 못해, 거리 표시가 전혀 없는 주로에서 10마일의 거리감을 몸에 입히지도 못해.

두 번째 10마일

화장실에 다녀왔다. 손 세정제를 묻힌 두 손을 기도하는 심정으로 문지른다. 출발선 옆 천막으로 걸어가 달리기 참가자들이 출발 전에 가져다 놓은 간식이 펼쳐진 탁자 앞에 선다. 견딜 수 없이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프기 전에 수분과 영양소를 내 몸 곳곳에 공급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콜라를 한 캔 마신다. 등에 맨 배낭에 이미 마실 것과 먹을 것이 충분하지만 콜라를 매고 뛸 순 없는 거니까. 그리고 다 마신 콜라 캔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순간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가 내린 모든 결정이 자기 파괴적이라 느낀다. 이 느낌대로라면 완주할 수밖에 없겠다는 절망적인 희망에 빠져버린다.

아까 달려온 길을 다시 마치 새로운 길을 달리는 듯, 전에 같이 달리던 사람들을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다 잃은 채로 홀로 달린다. 정말 아무도 없나, 두리번두리번 점점 느려져만 가는 발걸음과 함께. 개와 산책 나온 사람들이 위아래로 나를 훑어보다 묻는다. 몇 마일 레이스야? 31마일. 뭐?


세 번째 10마일

화장실에 다녀왔다. 손 세정제 묻은 두 손을 탁탁 소리 나게 털면서 출발선 옆 천막으로 두 다리를 땅바닥에 질질 끌며 걸어가 달리기 참가자들이 먹어야 할 간식이 좀 사라진 탁자 앞에 섰다. 턱수염이 배꼽까지 내려오는 요정님은 역시 이미 완주하시고 집에 갈 채비를 하고 계셨다. 완주를 포기하겠다고 주최 측에 신고하는 사람이 몇몇 있길래 나도 그 분위기에 휩쓸려 내 아픈 진심을 고백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콜라와 땅콩버터 샌드위치를 먹었다. 하지만 남편이 나를 여기 내려놓고 첫 번째 10마일까지만 응원해 준 뒤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어차피 그가 날 데리러 오길 기다리는 시간이나 남은 거리를 마저 달리는 시간이나.

발바닥, 종아리, 허벅지, 허리, 어깨, 온몸이 다 아파. 나는 마지막 10마일을 걷다 뛰다 잠들 뻔도 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달리 보이는 공원 풍경에 숲 속에서 길 잃은 아이처럼 뛰어도 걸어도 점점 멀어지기만 하는 결승선을 향해 이젠 정말 기어야겠어, 정신 못 차릴 무렵 남편과 고등학생이 내게로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이렇게 사서 하는 고생에도 구원이 있어, 소년은, 소년은 어디에? 안 왔어? 차 안에.

차 안

완주 거리 51.75km, 걸린 시간 8시간 15분 56초. 내년에 다시 한번 더 달리면 지금보다 빠르게 완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이, 농담으로라도 선뜻 나오지 않아, 더 이상 달리기 거리를 늘릴 수 없겠다고, 이 거리가 내 몸의 한계라고 두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데. 지칠 대로 지친 몸은 악독한 기운이 다 빠져나간 공터와 다름없고. 내년에 트레일 러닝화 신고 딱 한 번만 더 뛰어봐, 나 그 공터에서 자아 분열 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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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혜이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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