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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잊드라 Nov 21. 2024

뭐 하는 거 좋아해?

나름 까다로운 기준이 있었다고

"당신은 뭐 하는 거 좋아해?"

며칠 전에 남편이 내게 물었다.

다정하게 묻는 남편에게 도저히

..이준호.. 라고 답할 수 없었다.

난 긴 침묵 후에

"맛있는 거 먹는 거 좋아하고 카페 가는 거 좋아해."라고 답했다.






진실을 말하자면, 하루 중에서 내가 제일 기다리는 시간이 11시 이후부터 준호 영상을 보는 시간이다.

며칠 새벽 4시까지 유튜브를 헤엄쳐 다녔다.

걸어 다닐 때는 영상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에어팟을 끼고 준호 노래를 듣는다.

가수를 좋아하게 되니 귀가 쉴 틈이 없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요즘 생존과 육아를 제외한 거의 모든 내 시간을 이준호 하는 데 쓰고 있다는 것이다.


진짜 인생을 이렇게 쓰잘데기 없는 데에 써도 되나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이런 문구를 보게 되었다.


어느 모로 보나 시간 낭비인 짓을 하고 있는데도 당신은 웃고 있군요.

그렇다면 그건 더 이상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파울로 코엘료


이 문구에 의하면 나는 시간낭비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난 웃고 있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말하자면 나는 쉽게 덕질하는 사람이 아니다.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허비하게 될까봐 드라마도 잘 안 보는 사람이었다.

덕통사고 당할 것 같으면 일부러 콘텐츠를 피하기도 했다.

유튜브 알고리즘을 애써 다른 것으로 돌리려고 학습 위주의 콘텐츠를 클릭했다.


게다가 덕질 조건도 있었다.

그동안 연예인에게 빠질 뻔! 하다가 당사자를 파고들면서 한순간에 식는 계기들이 몇 가지 있었다.

일단 인성논란이나 과거 사진에서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게 있으면 해당 연예인은 스킵이었다.

허세 안되고 명품 주렁주렁 안 좋아하고 일본활동도 영 별로였다.

다시 말하면 나는 아주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걸 모두 순조롭게 넘겨버렸다.

이것들을  모두 넘기다니


명품 협찬 - 극복 / 그럴 수도 있지 뭐. 자본주의 사회 다 돈 벌려고 하는 건데.

장신구 주렁주렁 - 극복 / 저것도 어울리는 사람이 있네. 괜찮네.             

외제차 - 극복 / 저렇게 열심히 일하고 돈도 많이 버는데 외제차 몰 수 있지 뭐. 안 그래도 바빠서 돈 쓸 시간도 없는데 차도 못 사나?            

일본 활동 - 극복 / 일본 팬들이 한국에서 인정받지 못한 준호를 살렸네, 일본 팬들 참 고맙네. 생각해 보니 일본에서 돈을 벌어오는 거니까 나름 애국이네.           


와. 내가 이렇게 합리화가 능숙한 인간이었구나.

결론은 사랑으로 그동안의 모든 조건을 넘겨버렸다는 것이다.


이번에 깨달은 게 있다.

내가 그동안 몇 시간이고 스마트폰을 터치하며 커뮤니티 글을 신중하게 읽고 드라마를 보고 블로그의 이웃글을 봤던 것은 도파민과 엔돌핀을 얻으려는 몸짓이었다는 것을.


그런데 이제 준호영상을 보는 것보다 내게 단시간에 기쁨을 주는 것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2pm영상을 보며 깔깔거리고 있을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카페, 드라마, 블로그 글들이 모두 시큰둥해진 것이다.

결국 그동안 인터넷에서 보냈던 많은 시간들이 절대적으로 내게 필요한 시간이 아니라 쉬운 즐거움을 찾기 위한 시도였던 것이다.

애정하던 유튜버들의 영상을 보지 않게 되었고 기다렸던 블로거의 글도 클릭하지 않게 되었다.


며칠 덕질하고 느낀 점


첫째, 아이돌 덕질은 위험하다. 콘텐츠가 너무 많다. 봐도 봐도 끝이 없다. 배우 덕질은 그 드라마의 배역을 좋아하는 경우가 많아서 현실 사람을 파다 보면 마음이 식게 되었는데 처음부터 사람 자체를 좋아하다 보니 탈덕이 쉽지 않은 것 같다. (탈덕 = 입덕의 반대, 덕질을 끝낸다는 뜻)

둘째, 덕질하기 좋은 세상이다. 라떼는 비디오 테이프랑 사진 모으고 그랬는데 요즘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덕질할 거리가 나온다. 거의 실시간으로 온라인에서 준호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개인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할 수도 있고 이준호 공식 유튜브도 있고 팬들이 운영하는 유튜브는 말할 것도 없다. X(트위터)와 각종 아이돌 관련 커뮤니티도 활성화되어 있다.

셋째, 시간이 없다. 내 가장 큰 취미 생활은 블로그였는데 포스팅할 시간이 없다. 커뮤니티 들어갈 시간도 없다. 짬나는 대로 소속 커뮤니티 글을 확인하곤 했는데 며칠째 글도 제대로 못 봤다. 이제 나의 가장 큰 취미 생활은 이준호가 되어버린 것이다.


유튜브에서 준호에게 선물 공세하고 전광판 이벤트 하는 팬들을 보면서

'저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신기루같은 우주대스타를 바라보며 난 지금 뭘 하는 걸까.'

갑자기 현타가 오기는 하지만 지금은 이게 제일 재미있는걸.

(현타 = 헛된 꿈이나 망상 따위에 빠져 있다가 자기가 처한 실제 상황을 깨닫게 되는 시간)



뭐 하는 거 좋아해?

뭐 할 때 행복해?

삶의 낙이 뭐야?




응.. 이준호.





(2024. 05. 09.)

(커버사진 출처 : 이준호 공식 인스타그램 @post_leejun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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