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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ed Enabler Dec 14. 2021

3. 정성이 쉽나요?

2학년 1학기 때는 아이가 학교나 학원에서 리포트나 독서록을 받아 올 때 유독 많이 쓰여있는  문장이 있었다.

글씨를 또박또박 쓰세요


아이의 글씨는 흐물흐물 휘리릭~ 정말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띄어쓰기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이런 피드백에도 불구하고 개선이 없자 다시 달린 피드백은

글씨를 정성껏 쓰세요


마치 그 문장은 이 시간에 대한 너의 정성이 부족하다.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듯하여 지나칠 수 없었다.

아이의 하늘 달리는 글자는

'쓰기 싫어, 손 아파, 빨리 끝내자...'등 의 무언의 저항을 내뿜고 있었고, 거기에 선생님들은 '너의 공부에 정성을 다하렴'이라고 붉은 경고를 보내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글씨보단 글을 쓰는 마음과 내용에 집중하고자 했다. 글을 쓸 때 '글씨가 왜 이래, 또박또박 써'라고 지워나간다면 아이의 글심에 진척이 있을까?

아이가 쓰고자 하는 글의 핵심을 괜히 시작도 전에 글씨로 꺾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또 이제는 웬만히 타이핑 시대인데 꼭 예쁜 글씨를 써야 할까?라는 나름의 합리화도 한켠 있었고-


근데 막상 '네가 몰라서 그래! 다른 애들 글씨가 얼마나 이쁜지'라는 엄마의 말과 적어도 띄어쓰기는 해야 한다는 것, 또 1과 7은 구분되어 보여야 한단 생각에 글씨 개선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글씨 개선 프로젝트


0. 학원 원장님이 주신 팁은 아이의 글씨가 일정 수준 이하면 바로 지우고 다시 쓰게 하라는 것

1. 지우기는 일정 수준 이상 될 때까지 물러섬이 없어야 한다는 것

2. 내가 더한 아이디어는 매일 하루 10분의 필사 시간

3. 기왕이면 학습도 되도록 동시를 필사한다!


야침 차게 세운 프로젝트는 매일의 눈물의 시간으로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아이는 기껏 쓴 글씨를 지우 반복하는 좌절감에 눈물이 났고, 10분의 집중이 안되어 울기를 반복함에 성난 나의 목소리에 또다시 눈물 연신 흘렸다.


그 시간 동안의 나의 내적 갈등은 엄청났다. '이렇게 울고 쓰는 건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은데'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대로 무너지면 암 껏도 안돼! 정성을 보여주마!'라는 각오를 수도 없이 다짐했다.


'네가 글씨에 신경 쓰지 않으면, 네가 한 다른 노력은 맨 처음 보는 글씨 때문에 묻히는 거야!' 우는 아이에게 호소에 가까운 말을 한 뒤 자리를 박차고 나오면서,

'아니 대체 왜 10분 연습이 이렇게 싫다는 거야? 딱 10분인데!?'라고 생각하다 아이가 그 10분조차도 싫어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라는 진지한 의문이 들었다.


재미가 없어요.

... 그게 정말 다 다.

재미!


재미: 아기자기하게 즐거운 느낌/ 좋은 성과나 보람

아이가 느끼고 싶은 건 하면서 즐거운 기분이었지 이런 좌절감은 아녔으리라. 우리는 누구나 그렇다.

무엇을 할 때 좌절감을 느끼고 싶은 사람은 없다.


글씨 쓰는 시간은 아이에게 즐거울 기대가 없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쓰면 지우기나 하는 시간.


난 검색창을 열어 이렇게 쳐보았다.

글씨 재미있게 쓰는 법

그제야 내 눈앞에 주르륵 펼쳐진 재미있게 쓰는 정말 많은 방법들, 거기엔 내가 봐도 재밌어 보이는, 이미 많은 부모들이 효과를 봤던 방법들이 올려져 있었다.


'아니! 난 이걸 왜 한 번도 찾아볼 생각을 안 했지?'

그 순간 떠오른 단어는

정성

그렇게 정성에 꽂혀있던 내가 아이가 글씨를 좀 더 낫게 쓰기 위해 정성을 들였던 걸까?

너무도 흔한 방법 -효과적 방법을 검색해보는 것- 조차 시도할 생각도 못했던 내가 '정성 들여 써라'라고 강조하며 아이의 글씨를 지우고 지우는 시간이 마치 정성을 투입한 시간인 양 느꼈던 것이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아이의 글씨를 개선하고 싶었다면 좀 더 치열하게 진정 고민했어야 했다.

좌절감보다는 기쁨을, 즐거움을, 그리고 만족감을 주어야 그 시간을 기다리고 노력한다는 것을...


난 펼쳐진 방법들 중 '가족이 함께 좋아하는 동화책 필사하기'를 선택했고, 벌써 네 권째 필사를 마치고 있다. 그 시간을 좋아하는 아이가 어찌나 철저히 체크하는지, 가끔 꽤가 나도 하루도 스킵이 불허하다.


정성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던 엄마는 되려 정성을 배웠다.

이만큼 정성을 들이는 일이 참으로 어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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