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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ed Enabler Dec 18. 2021

5. 나도 다 생각이 있다고

2학기 말 국어, 수학 수행평가를 한다는 알림장 소식을 보고 난 아이에게 '만약 엄마랑 국어 책을 같이 한번 훑어본다면 도움될지 몰라, 네가 원하면 가져와'라고 했다.

꼭 가져오라고 하지 않은 건 한창 열린 마음(이라 부르고 속으로 좀 귀찮았던 마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평가 보기 며칠 전, '엄마 오늘 교과서 가져왔어요!'라는 말에 와우! 정말? 웬일이야 라는 생각에 '와~~ 수행 평가전에 엄마랑 한번 공부하려고 한 거야? 스스로 하겠단 마음이 참 좋다!'며 폭풍 칭찬을 했다.

역시 스승님, 시큰둥하더니 다 생각이 있었군 하는 마음도 들어 왠지 흡족했다.


가방을 열어보니...'아니! 이건 겨울 책이잖니?' 

그랬다. 그건 수행평가 과목 책이 아닌 겨울 책

'아 그래?' 그러더니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아이고 요놈아!


그래! 어떠냐. 자발적으로 챙겨 온 마음이 중요하지!

'열심히 갖고 왔으니 겨울 책이라도 엄마랑 보자!'

아이는 흔쾌히 후다닥 책상에 착 앉는다. 교과서를 펼치더니 세계 여러 나라 동요 페이지를 열었다.


'엄마! 오늘 이 나라들 동요를 선생님이 틀어줬어요, 우리 다시 번 들어보자. 핸드폰!'


얼떨결에 나라별 동요 영상을 틀어주던 나는 보았다!

너무나 신나고 해맑으며 열정적으로 영상의 노래를 따라 부르던 녀석의 모습을... 문득 스쳐 지나간 굉장히 합리적인 의심이 떠올랐다.


'너... 오늘 이 노래들 다시 부르고 싶어서 겨울 책 부러 챙겨 왔구나!' 순간 열심히 노래를 따라 부르던 스승님의 입가에 씩-하며 퍼지는 모습이란 나 이 장면 어떤 영화에서 본 거 같은데...


애초 수행평가 예습 의도 따윈 아예 없었던 거였다. 단지 녀석은 수업시간에 충분히 부르지 못한 노래가 아쉬워 교과서를 챙겨 왔으리라!

주도면밀이란 말을 여기에 써야 할까, 짐짓 교과서를 잘못 챙겨 왔다는 듯한 그 표정이 다시 떠올랐다.


아이고, 아랑곳 않고 케냐의 동요 '잠보'를 따라 부르는 모습이 어이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여, 그냥 나도 신나게 잠보를 따라 불러보았다. 그래... 네가 봐보면 알겠지.

잘 쓰면 쓰는 대로, 잘 안 된 다면 안 되는 대로-


일주일 후, 아이는 수행 평가지를 들고 하교하였다. 국어 평가는 논술이었는데, 주말에 있었던 일을 적는 것이었다.

평소 아이는 다른 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대답이 없거나 짧거나였다.

그런데 이외로 아이는 주말 일을 그리고 내가 나누던 대화를 매우 상세히, 그리고 자신의 기분을 써 내려갔다.


글을 보며 나는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믿어야 하는구나. 그리고 믿을 수 있구나.

한편으로는 그 순간에 약간의 해방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지금 이 순간 다시 아이의 공부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이 함정이지만, 잠시나마 그날에 느꼈던 안도감과 해방감을 잊지 않아야겠다.


9년 생은 이제 43년생에게 이렇게 말한다.

'엄마 나도 다 생각한 게 있어요. 알아서 할게!'

이야 우리 아들 다 컸구나.


한 달의 한번, 한 순간의 독립이 아닌 매 그날을 꿈꾸며 오늘도 아이 책가방을 열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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