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 무등산-201509
유순해 보이지만 낮지 않은 산, 수 천만년 전 솟구치던 주상절리와 무너져 내린 너덜과 그리고 도심을 붉게 물들였던 불과 삼십여 년 전 피의 역사까지 고스란히 품고 있는 산, 저 홀로 호남 벌판에 우뚝 선 탓에 온갖 풍파를 겪고 보고 안고 온 산이 무등산이다.
무등에 오른다. 삼십여 년 만에 만난 친구는 무등에 오르려는 내게 길안내를 자처하며 기꺼이 동행 해준다. 까까머리 시절, 그저 같이 뛰어 놀기만 하여도 좋았던 무구無垢 의 한 시절을 함께한 친구. 현실에 끄달린 굴곡진 삶은 언제 부터인가 추억이라는 것조차 사치라 여기며 기억을 지워낸 채 바둥거려야 했고, 그러는 사이 세월은 삼십여 년이나 훌쩍 지나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친구들마저 잊고 지냈었는데, 인연의 끈이 남아 있었는지 삼십여 년의 세월 지나 옛 친구를 만나게 되었고, 다행스레 오랜 간극에도 불구하고 되살아난 기억 속 친구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변함없었다. 다만 세월의 흔적이 친구나 내게 군데군데 훈장처럼 남아 있을 뿐.
원효사를 들머리로 시작한 산행은 호젓한 산길로 한참을 이어지더니 중턱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야가 열린다. 오르는 내내 광주에 안착한 지 이십 여년이 넘었다는 친구는 무등산을 꿰뚫어 보고 있듯 세세한 안내를 잊지 않는다.
중턱을 지나고 나니 산은 무등의 진면목을 그제야 내어준다. 유순한 산구릉 곳곳으로 서석대를 비롯한 천왕봉, 입석대와 크고 작은 주상절리대가 솟구쳐 있고, 도편陶片터 마냥 나뒹굴고 켜켜이 뒤엉켜 있는 너덜의 모습이 기기묘묘하며 이색적 풍경을 자아낸다. 그 모습은 마치 잔잔한 바다 위에 드문드문 떠있는 섬과도 같고, 가까이서 보면 하늘에 제를 지내기 위해 석공이 바위를 깎던 제석장 터 같기도 하다. 그 장관을 보며 할 수 있는 것은 연신 '놀랍다'는 감탄사뿐 달리 뭐라 붙일 형용사가 없다.
다만 아쉬운 건 정상에 들어선 군사시설로 인해 천왕봉을 비롯하여 지왕봉, 인왕봉을 먼발치서 밖에 볼 수 없다는 것. 수십 년 대치 속에 끝나지 않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리의 현실로서는 군사는 필수 불가결한 상황이지만 헤아리기 조차 힘들 만큼 많은 산의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군사 시설들을 보면 산에 오를 때마다 씁쓸한 마음 감출 수 없다.
큰 감흥을 뒤로한 채 입석대 지나 장불재를 향해 내려오는 길, 군락을 이룬 억새는 금방이라도 하얀 꽃순을 터뜨릴 기세이고 키 낮은 나무들은 무서리 내리기를 기다리며 옷 갈아입을 채비가 한창이다. 산정을 넘는 바람결에도 가을이 이미 와 있음을 알려주듯 쌀쌀함이 묻어있다. 가을이 오면 산은 또 어떠한 모습을 내어줄까. 불현듯 무등의 가을이 궁금해진다.
장불재 지나 중봉을 향해 걷는 사이 변화무쌍한 드라마 한 편을 보여주던 석양은 이미 나주 벌 너머로 내려앉았고 추석을 앞둔 눈썹달만이 하늘을 차지하고 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산길에는 간간히 따르는 물소리와 나란히 걷는 발자국 소리만 자박자박 들릴 뿐 멈춰 서면 이내 적막이다. 나란히 걷는 발걸음이 있어 위안되고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소중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더불어 동행하는 누군가 있다는 사실, 그 사실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산은 내게 묵묵히 일러주었다. 어둠이 깊을수록 불빛은 밝아지는 법,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은 하산 길에 만난 광주시내 야경은 무등을 찾은 내게 주는 덤이었고, 날머리 호젓한 식당에서 나누던 소주 한잔은 긴 산행의 피로를 풀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꼭 한번 오리라 했던 무등산, 크고 방대하고 볼 것 많은 산이어서 출장길 자투리 시간 내어 오르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 덕에 '다음'이란걸 기약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 핑겨삼아 친구 얼굴 또 볼 수 있다는 기대감도 벌써부터 가슴 설레는 일이다. 늦가을이든 서설瑞雪 내리는 찬 겨울이든, 아니면 새순 오르는 사월이든 분명 다시 찾을 것이다. 그때도 역시 광주 사는 친구한테 나는 슬쩍 길안내 부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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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지리지인 <택리지>에는 “광주의 무등산(無等山)은 산세가 지극히 준엄하여 온 도를 위압한다”라고 기록돼 있다. 높이가 1187m에 달해 ‘주변에 견줄 만한 상대가 없어 등급을 매길 수 없다’는 뜻으로 ‘무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과 절대평등의 깨달음을 뜻하는 무등등(無等等)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2012년 21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증심사를 비롯한 원효사 등 사찰 문화와 주상절리대등 자연문화가 산재해 있는 호남의 으뜸 명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