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어차피 영원하진 않으니까.
인간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가장 슬퍼질 수 있다.
스페인의 어느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발병하는 고산병과 비슷한 증세.
전원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이 행복을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에 나타나는 증세.
영국 의학협회에서는 이 증세를 '안헤도니아'라고 규정했다고 한다.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에서 접한 단어, 안헤도니아
나 역시 안헤도니아 환자라고 할 수 있겠다.
벅차게 행복할때에, 아니아니, 조금이라도 행복하다 싶으면 증세가 나타난다.
모든 행복들이 영원할 순 없다는게 너무나 당연해서, 이 행복이 지나는걸 행복한 와중에 걱정하기 시작한다. 아주 가끔은 이 행복이 지나고 내가 어떻게 또 얼마나 망가질지에 대해 괴로운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들이었기는 하지만,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가장 슬퍼질 때가 있었다.
한때는 그래서 더 행복을 갈망하기도 했다. 영원할 수 없는 행복들이 계속 계속 다른 형태로 다가와준다면, 이 행복이 지나기 전에 다른 행복이 와준다면, 어쩌면 영원한 행복에 가깝진 않을까. 행복한 순간이 지나고 나서의 상실감과 그 후 망가진 나에 대한 괴로운 상상 따위 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가장 슬퍼지는 비극의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행복을 갈망하고 갈망했다. 행복의 상실이 곧 나의 상실인것마냥.
그런지도 꽤 많은 시간이 지나고나서야, 숱한 행복을 지나보내고 나서야 행복의 상실은 나의 상실과 관련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행복이 지나면 다른 행복은 기다리지 않아도 오기 마련 이었고, 행복이 지나고 망가진 나는 수십해의 행복을 잃는 동안 결코 없었다. 아직은 행복한 와중에 문득문득 이 행복을 잃게될까 생각하지만, 두려움보단 아쉬움에 조금 가깝다. 모든 행복이 영원할 순 없다는 것, 손에 쥔 모래 마냥 꼭 쥐어도 빠져나가기 마련이라는 것은 더 확실하게 알게 되었지만 모든 불행들 역시 그렇다는것도 알았다.
그러니 내가 가져야만 하는 태도는, 겪고 있는 행복에 아쉬움을 덜어내려는 태도. 행복한 순간은 온전히 그 순간만으로 만끽하려는 태도. 불행들 역시 영원하지 않기에, 조금은 덤덤히 지나보내려는 태도. 모래를 쥐지 않으려는 태도다.
행복과 불행은 어쩌면 같아서,
인간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가장 슬퍼질 수 있지만
인간은 가장 슬픈 순간에 가장 행복해질 수 도 있지 않을까.
아직 안헤도니아 환자인 나는 그 방법은 알 수 없지만,
분명 조금 덜 슬퍼하려는 노력 정도는, 할 수 있을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