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타 아티스트, 무라카미 타카시가 1998년부터 사비를 털어 개최했던 아트 페어인 “게이 사이(Geisai)”는 한때 자~알 나가는 아트 이벤트로 일본의 젊고 배고픈 작가들에게는 꿈의 무대와 같은 곳이었다. 지금은 유명무실해진 이 아트페어는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기긴 했다.
첫째는 사비를 열심히 털어 넣은 무라카미 다카시를 재정적으로 거덜 나게 한 것이고, 둘째는 걸쭉한 스타 한 명을 배출했다는 것인데 그는 돈 싸 들고 읍소해도 그림이 나올까 말까 하는 로카쿠 아야코다. 그녀는 2006년 제9회 게이사이때 입선 정도에 해당하는 스카우트상을 받았다. 그 후 15년이 지난 지금 로카쿠 아야코는 말이 필요 없는 글로벌리 성공한 작가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 2006년 게이사이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당시 도쿄 예술대학교 유화과에 재학 중이던 학생이 1등인 금상을 수상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야마구치 소이치(SOICHI YAMAGUCHI). 어린 나이에 무라카미 다카시의 눈에 들어 최고 상을 수상한 그는 곧 일본 미술계의 주목을 받으며 단숨에 이머징 작가로 성장하게 된다. 각종 수상은 물론이고 학생 신분으로 도쿄 오페라시티 하우스(Tokyo Opera City Art Gallery)에서까지 개인전을 열게 되며 미래의 스타로 컬렉터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그.러.나.....작가의 인생이란 험난하고도 먼 길...
이렇게 잘 나가던 예비 스타는 곧 나락의 길로 빠져들고 마는데, 악질 갤러리와 전속 계약을 잘못하는 바람에 그림은 그림대로 뺏기고 전시회를 3년 동안 열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계약에 묶여 어떠한 활동도 하지 못하게 되는, 그의 작가 인생 최악의 시기를 보내며 사람들에게서 잊혀 가게 된다.
그리고 10여 년의 시간이 지난 2022년 10월 12일 오후 야마구치 소이치의 그림 앞에 다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도쿄 롯폰기 잇초메에 위치한 ANA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야먀구치 소이치와 카타야마 타카시의 듀오 전시가 열리고 있다. 8월부터 시작된 이 전시는 무더위를 피해 10월의 중간에 리셉션 행사를 개최했는데 전시 기획은 일본 미술계의 유명 큐레이터인 노리코 카시와기씨가 맡았다. 먼저 노리코 씨의 인사와 간단한 전시 설명으로 이벤트가 시작되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와주셔서 흡족했다.
그리고 이어진 오늘의 주인공인 소이치 야마구치의 인사말과 자신의 신작에 관한 설명이 시작되었고 참가자들은 놀라운 집중력으로 경청을 하였다. 물론 나는 멀찍이서 시원한 화이트 와인으로 수분과 알코올을 보충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이 전시를 찾은 것이 이번이 세 번째여서 어디에 무슨 작품이 걸렸는지 눈에 훤하다. 이렇게 세 번이나 전시를 찾은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3년여 넘게 지켜보아온 그의 작품이 풍성하게 살을 찌워 토실토실 무르익어 몇 번이고 그의 그림이 보고 싶어서였다. 한마디로 그의 인생 최고의 걸작들이 이번 전시에 쏟아져 나왔다.
내가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림이 똑똑하기 때문이다. 군더더기 없이 아주 스마트한 그림, 특히 "화가로서 색이라는 것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것인가?"에 관하여는 내가 보아온 어느 작가보다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데, 가끔은 색이란 그에게 감각이 아닌 본능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색은 그의 혈관을 흐르는 어떤 물질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바로 이 작품, 무려 500호의 초 대형 작품. 작가가 100일 이상 혼신을 쏟아 만든 소이치 야마구치의 작가 인생 최고의 대작이다. 8월의 무더운 어느 날 전시장을 홀로 찾아 이 작품을 본 순간 '이 그림에게는 무언가가 일어나야만 한다!'라는 생각이 댓바람처럼 스쳤다.
그리고 "무언가가 일어났다"
이날 저녁 작가는 연신 웃음을 짓느라 바쁘다. 그가 함박웃음을 지은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의 작품이 처음으로 뮤지엄의 공식 컬렉션이 되는 소식을 행복하게 전할 수 있어서였을 것이다. 소이치 야마구치의 인생 최대 작품, Overlap of paint (dot 6)은 제주 본태 뮤지엄(bonte Museum)의 공식 소장품으로 선정되어 곧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넘게 되었다.
작가가 자신의 걸작을 설명하던 중에 열심히 와인을 마시고 있던 나에게 노리코 씨가 갑작스럽게 스피치를 요청했다. 짧은 일본어로 어버버버하며 이렇게 훌륭한 작품이 본태 뮤지엄에 소장되게 되어 기쁘고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전하며 소이치 야마구치의 작품을 볼 때마다 어째서 그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되지 않았는지를 생각하게 되며 이제는 그렇게 돼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오래간만에 아틀리에를 벗어나 도쿄 시내에 나온 소이치 군, 카메라 플래시를 조명 삼아 스피치도 하고 컬렉터들의 질문에도 답해주고, 소싯적 잘 나가던 자신의 모습이 조금은 데자뷔로 다가왔으려나?
행사 다음날 저녁, 누구보다 소이치 군을 아끼는 노리코 씨에게서 이메일 한 통이 왔다. 그리고 나는 그 짧은 메시지에 여러 감정이 뒤섞여버렸다.
"저는 아직도 이 모든 것에 정말 흥분이 됩니다. 소이치 군에게 어제 메시지를 받았어요. 그가 어제 아틀리에를 나와 밖에서 사람들과 술을 마신 것이 일 년 만이었다고 합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순진하고 성실하고 예의 바른 작가, 소이치 야마구치가 활짝 웃는다!
오늘은 그의 날이다.
11월, 곧 그의 작품들이 서울의 컬렉터들을 찾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