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도는 매수용이세요, 매도용이세요?
인감증명서가 필요해서 찾은 동네 면사무소에서, 내 민원을 처리 중이던 직원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는 그만 평정심을 잃고 만다. 매수? 매도? 그런 건 왜 묻지? 난 그저 서류 종이 한 장이 필요할 뿐인데? 집 사는 거니 매수겠지? 아닌가? 줄 '수'가 아니고 받을 '수'인가?
"네? 아, 이게, 그 저기 뭐냐...... 주택담보대출을 좀 받으려고요."
잔뜩 당황한 내 대답에 아무런 반응도 없이 모니터만 응시하던 그녀는 곧 서류를 인쇄해 내밀었다.
"1,200원입니다."
아, 돈을 내야 하는구나! 또 한 번 당황하며 허둥지둥 주머니를 뒤진다. 다행히 지갑 속에 자리한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네자 기다렸다는 듯 신속하게 돌아오는 8,800원. 지폐와 동전들을 대충 움켜쥐고 인감증명서를 챙겨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왠지 모를 부끄러움과 끝났다는 안도감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둘 다 탐탁지 않은 느낌이라 애써 떨궈내려 고개를 저어 본다.
회사에 요청한 재직증명서와 인터넷을 통해 미리 발급받은 각종 증명서들, 거기에 방금 땐 인감증명서를 보탠 뒤, 신분증과 인감까지 챙겨 부동산 중개소로 향했다. 거기서 대출 상담사를 만나 다음 달에 이사할 집을 담보로 대출을 진행하기로 한 것. 남은 시간이 촉박해 급히 차를 몰아 도착하니 그는 이미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나는 준비한 서류를 내밀었다. 혹시나 빠진 게 있진 않을까 잔뜩 긴장한 채, 나도 모르게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곤 마른침을 꼴딱 삼켰다. 제발 무사히 넘어가길.
"아이고, 근로소득원천징수부를 인터넷 발급하셨나 보네요?"
상담사의 입에서 맨 먼저 붙어 나온 '아이고'가 나의 준비에 뭔가 오류가 있음을 알려준다.
"자, 여기 보시면 회사명이랑 대표명 다 안 나오고 가려져 있죠? 이거는 쓸 수가 없어요. 회사에 얘기하셔서 새로 받으셔야 되겠네요."
아, 역시나 문제가 생기는구나. 인터넷으로 발급이 된다길래 좀 편해보겠다는 요량으로 했건만, 이렇게 발목이 잡히는구나. 다시 준비해서 보내겠다는 걸로 일단은 패스. 자, 이제 도장을 찍기 위해 준비한 인감을 꺼내놓는다. 뭐니 뭐니 해도 계약서의 꽃은 도장 찍기 아니겠나? 상담사가 이 경건한 절차를 위해 내 인감을 집어 들어 인주를 묻히려는 그 찰나,
어? 이거 인감증명서 인감이 아니네요?
이게 무슨 소리? 증명서를 보고는 아차차, 그 순간에야 이 인감증명서라는 것의 쓰임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증명서의 인감은 십수 년 전, 혼자 살기 위한 원룸을 계약하면서 싸구려 도장으로 급하게 만들었던 것이고, 상담사의 손에 들린 것은 결혼하고 이제 어른이니 도장 같은 도장이 있어야지 해서 돈 좀 들여 새로 만든 것이었다.
인감증명서를 발급받으며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한글로 쓰인 내 이름 석 자를 똑똑히 보고도, 지금의 한자로 새겨진 인감도장과의 같지 않음이 불러올 문제를 전혀 생각지 못했다니, 어쩌면 몰라도 이렇게나 모를까? 내 앞에 앉은 상담사는 속으로 얼마나 나를 무시하고 있을까 생각하니 순식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일단 지금 이 인감으로 서류 진행하시고. 어디 보자...... 오늘이 금요일이니까 다음 주 월요일 오전까지 인감증명서 인감을 지금 쓰시는 걸로 새로 바꿔서 다시 가져다주시면 최종적으로 대출 심사 신청하겠습니다."
상담사는 해결책과 함께 종종 이런 경우들이 발생한다며 상기된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위로(?)했다. 예전에 만들어 놓고 잊어먹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며, 꼭 월요일 오전까지 근로소득원천징수부와 함께 새로 준비해달란 당부를 덧붙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내 생각했다. 나도 능숙하게 살고 싶다. 면사무소 직원이나 대출 상담사처럼 막히거나 서투름 없이 익숙하고 싶다. 어쩜 이리 모르는 것 투성일까? 나이 마흔의 어른으로 애 둘을 키우는 어엿한 부모라 칭하기에는 경험의 부족이 가져다주는 두려움과 낯설어함이 일상의 곳곳에 팽배하다.
혼자 웅크린 채 숨어서 세상만사 다 차단하며 살기에는 내가 책임지고 만들어가야 할 것들이 많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좀 더 든든한 울타리가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더 많은 서류를 준비해 보아야 하고, 어쩌면 더 많은 실수와 실패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한 곳에만 머무려고 하는,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려 드는 마음을 깨부수지 않으면 안 된다. 능숙하게 산다는 건, 결국 내 미숙함을 꺼내놓는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며칠 뒤 한주가 지난 월요일 오전, 인감증명서를 변경하기 위해 면사무소를 찾았다. 신분증과 인감도장을 제출하고는, 의자 뒤에 푹 하고 몸을 기대어본다. 인감증명서를 내가 왜 얻으려 하는지, 그 과정에 어떤 질문이 나오고 얼마의 돈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이제 알기에, 전과 달리 나는 세상 편한 얼굴로 민원 해결을 기다릴 수 있게 됐다. 그때, 역시나, 아니나 다를까, 직원은 내게 그것을 물어왔다.
"매수용이세요, 매도용이세요?'
옳지, 이거지.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