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난치질환 궤양성 대장염 반가워!
블로그를 운영한 지 2년이 접어들었다. 블로그 개설한지는 몇 년이 지났지만 본격적으로 나를 들어내고 나를 알리기는 만 2년.
내가 겪어왔던 투병 삶 중 가장 최근 일들을 쭉 기록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누구나 아플 수 있고
누구나 병 앞에서는 무너지고 마는구나! 였다.
희귀 난치질환인 궤양성 대장염은 완치도 원인도 알 수 없는 병이다. 그래서 그런가?
발명 당시 대학병원에서는 나를 실험하기 시작했다.
지독하게 아픈데도 불구하고 통증을 가라앉는 약을 처방하지 않았고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주고 받으며 환자 얼굴만 보고 갈 뿐이었다. 죽을 만큼 아팠던 통증은 어느 병보다 가장 아팠다. 매번 아팠던 나는 궤양성 대장염이 찾아오기 전 경추 1.2번 수술 후 사경을 헤매면서 이 병만큼 아픈 것도 없다고 느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아픔은 잊혀 갔고 새로운 고통으로 가장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 이겨낼 수 없을만큼 지독하게 고통스러웠으니까.
궤양성 대장염 발병 당시 장염인 줄로만 알았다.
장염이 이렇게 아플 수가 없었다. 그동안 수없이 겪었던 장염과는 아주 달랐다.
동네 내과를 전전긍긍하며 다녔다. 동네 작은 종합병원을 다녀봤지만 돌파리 의사에게 해괴한 이야기까지 들으며 자포자기했다.
반복되는 설사와 구토 증상, 시간이 가면 갈수록 복통은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목을 조여왔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심해졌던 건 혈변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장염. 동네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은 병을 더 악화시켰다.
두 딸아이를 등원과 등교를 봐줬던 나는 젖 먹던 힘을 다해 아이를 돌봤다.
더 이상 내 몸이 견디기가 힘들어 할 때쯤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자기야! 나 큰 병원 가야 할 거 같아! 너무 아프다. 너무 어지러워서 혼자 병원 갈 수 없는데 조퇴하고 집으로 와줘!"
난 이런 여자였다.
아파도 참고 견디며 해결되는 줄 알았다. 운좋게 이겨내면 스스로 자랑스러워했던 미련 곰탱이었다.
약간 아프면 쪼르륵 병원 가는 남편을 볼 때마다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그 정도 아픈 걸로 병원 가고 그래! 참다 병원 가지! 나 봐! 잘 견디고 잘 이겨내잖아'
나를 죽이는 일이라는 걸 모르는 체 아프면 참지 못하고 병원 가는 남편을 볼 때마다 화가 올라왔다.
화가 난 이유는 따로 존재했다.
죽을 만큼 아파도 견디고 참아낸 것은 몸을 학대한거였고 병을 키웠다. 병을 키웠기에 무서운 진단을 받기라도 하면 모든 식구들의 비난이 나에게 쏟아질 거라는 두려움이 몸과 정신을 휘감았다.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참고 견디는 유일한 자랑이자 비겁함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아무리 이야기하고 설득시켜도 황소고집이었다.
결국 남편은 내가 죽을 만큼 아파보고 병원 가는 걸 잘 알기에 기다려줬던 거.
조퇴하고 집으로 온 남편은 쓰러져 소파에 누워 있는 나를 보더니 안쓰러움보단 웃음기가 보였다.
자주 아팠던 나였고
계절 감기와 장염은 달고 살았기에
남편은 이골이 난 상태였다.
심상치 않다는 걸 감지한 남편은 나를 부축해 동네에서 알려진 종합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2012년, 9년 전에는 이 병이 드물었다.
먹지 못한 채 설사와 구토는 하루에도 수십 번이었고 설사만 하는 게 아니었다. 혈변을 보기 위해 화장실을 찾았던 날도 빈번했다. 염증으로 인해 고열에 시달렸야만 했다. 화장실을 가는 이유는 복통을 줄이기 위함이었지만 복통은 화장실을 다닌다고 해서 줄어들지 않았다. 더 심했으니까..
2012년 5월은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둥지를 틀어 행복을 누린 지 한 달 만에 아프기 시작했다.
병원에서의 검사를 끝내고 대기실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다.
'제발, 큰 병이 아니기를. 아이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지 않게 약과 주사로 낫기를'
기도는 이미 나에게 온 병을 직감했다. 그 직감을 잊기 위해 그리고 아니라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장 컸다. 담당 의사 진료..
입원하라는 진단과 함께 하늘이 무너졌다.
2003년 악몽이 떠올랐다. 2002년 11월 결혼을 했고 남편과 맞벌이를 하며 즐거운 신혼을 즐기고 있던 나에게 2003년 봄은 지독하게도 아팠다. 신혼 생활 3개월 만에 아파 투병을 했고 금방 집에 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입원했지만 6개월이라는 긴 투병을 했다.
이번에도 긴 투병이 될 거 같은 예감은 늘 그렇듯 비껴가지 않았다. 쉽게 고칠 수 없을 듯 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온갖 부정적인 에너지를 끌어모아 죄인이 되었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했던 나에게 '너의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벌'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남편의 얼굴을 쳐다봤다. 남편의 얼굴은 덤덤하면서도 또 시작이구나!라는 표정이었다. 자신의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내 탓으로 돌아는 거 같았다. 아픈 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나를 죄인으로 몰고 갔다.
결혼생활 10년 동안 제대로 된 스트레스를 풀지 못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살림을 정리하고 치우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러나 스트레스를 푼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스트레스를 끌어안고 내 머리와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다. 밤마다 분하고 억울한 일들을 상기시키며 다음에는 어리석은 행동과 말을 하지 않고 당당해지자라고 잠들 때까지 되뇌며 살았다. 20대를 걸쳐 30대에 오면서도 나쁜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고 반복의 연속이었다.
친구들과 수다 떨 수 있었다면 병에 걸리지 않았을까?
완벽한 성격과 모든 일은 내 손을 걸쳐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병에 걸렸을까?
삶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책임을 다해 일을 해결하고 한 집안에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맏이 노릇을 하느라 내 몸을 돌보지 못한 것은 그저 내 몫이었다. 아픈 사람만 서럽고 억울했다.
희생하면서 집안을 일궜지만 아프고 나니 주위의 냉담은 서운함으로 다가왔다.
차도를 보이지 않던 병은 고통에 고통을 거듭하며 병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고열과 빈혈 수치는 최고치를 치닫고 결국 입원 일주일 만에 퇴원하라는 병원 측의 이야기가 나왔다. 병명과 상관없는 항생제만 받은 터라 병은 더 악화가 되었다. 소름 끼치도록 싫은 병원의 소독약 냄새에서 그립고 그리운 내 집과 내 가족을 그리워하며 이겨냈지만 차도는 없었다. 더 이상 병원신세는 지지 않겠다며 다짐한 2003년 8월.
2012년 5월 병원신세를 져야만 했다.
누구나 아플 수 있다.
누구나 고통이 있다.
그러나 누구나 이겨낼 수도 있다. 나를 알면 충분히 이겨내고 삶의 주인공은 내 것으로, 드라마의 주인공은 내가 될 수 있다. 투병생활 글을 쓰고 그 글에 용기를 얻는 분들이 많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답변해주는 나는 그들의 부러움 대상이 되었고 간간히 댓글을 달아주는 환우분들이 희망을 얻고 간다고 용기를 얻고 간다는 댓글을 볼 때마다 내가 자랑스럽다.
이제는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며 용기와 희망을 전달하려고 한다. 나의 투병 삶을 나누기로..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삶이기에..그들과 써 내려가 보려고 한다.
한번 잃은 건강,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예전보다 더 건강한 생각과 마음을 준다.
나를 믿고 나를 알아가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