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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빈 작가 Aug 28. 2021

로맨스 소설로 사랑을 다시 배우는 지금 가장 아름답다

웨딩드레스를 벗기는 방법1.2 요안나 작가


한달 동안 로맨스 소설을 읽은 이유를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어요. 무작정 읽어야할 거 같아서 예스 24 앱을 열고 로맨스 소설 카테고리를 선택했어요. 이유는 그때까지 몰랐죠. 그냥 마음의 소리를 듣고 실천했을뿐이지만요. 거기에 분명 이유가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인풋하는 마음으로 종이책을 구입해서 열심히 읽었어요.



읽을때마다 내년에 이사갈때 이사짐 센터에서 한소리 하겠다는 생각하면서도 멈출수가 없었어요. 소설책에 빠지면 그날 다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를 알아가면서 참 많이 놀랐고 참 많이 당혹스러웠습니다.



남들은 재테크다, 자기계발이다, 부동산이다, 주식이다 하면서 앞서가고 있는데 저는 퇴색되는 느낌이 들어서 소설책을 읽으면서도 마음이 불편했어요. 머리로는 책 읽을때가 아니야! 어서 원고 수정해! 다그쳤죠. 그러나 손과 눈은 책으로 향하고 있어요. 물론, 마음이 그렇게 움직였습니다. 순전히 본능적으로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어요. 참 이상하죠. 할일은 태산인데 다 미루고 얼빠지게 사랑 책이라니...



근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10대 나를 발견했습니다. 아니 영유아시절이 떠올랐죠.



책을 좋아하고 있었다고, 다만 사랑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는것에 당황했어요. 어릴때도 소설책을 읽었다는 걸, 그게 로맨스라는 걸 기억났어요.



마음 깊은 곳 밑바닥에 껌처럼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밞아서 상처가 났고 상처 난 곳에 적절한 치료를 못한 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곪아 터지고 피가 나기를 반복한 껌의 실체가 들어났어요.



사실 지금도 원고 수정을 거부하고 있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해 책을 참 많이 읽었어요. 그런데 뾰족한 방법과 답을 찾지 못했죠. '난 원래 이런 사람인가?' '도대체 나의 마음과 머리에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힘들어 할까?' 온갖 물음표가 머리 위에서 둥둥 떠다녔어요.



과거를 회상할 수 있게 도와준 로맨스 소설책은 10대 학창 시절의 추억을 떠오르게 했어요.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사랑을 찾아가고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는 모습을 그리는 소설을 읽을때마다 '나도 저럴때가 있었구나!' 하며 희미한 미소가 얼굴에 번졌어요.



10대 학장시절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고 앞에서 한 이야기를 더 해보자면 내가 쓴 글이 참 무섭고 두려웠어요. 내 이야기이니깐 당연히 이해가 되지만 다른 사람의 눈을 바라봤을때 과연 이 글이 그들에게 얻어가는 건 있을까? 이 글이 과연 세상에 나와도 될까? 하는 불안과 함께 '나는 더는 내 글을 못 보겠어. 두려워. 어떻게 수정하고 어떻게 독자들에게 다가가야할 지 모르겠어' 하는 무서움이 먼저 앞섰어요.



그렇게 시작한 불안과 초조함 두려움이 엄습하면서 현타와 함께 번아웃과 동시에 오면서 급기야 슬럼프에 빠지고 말았죠. 지금 내 자신이 보호자이며 아이에게 유일한 보호자가 나였기에 이대로 주저 앉아 아무것도 안하고 아이에게 짜증을 내면서 '너 탓이야'라고 탓을 할 거 같았어요. 지금 이 순간 불안한 감정을 추스릴 수 있고 잠시 잊어버릴 수 있는 일이 뭔가를 생각했더랬죠.



암만 생각을 해도 책이었어요. 글쓰는건 이미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었기에 노트북도 꼴 보기 싫었고 컴퓨터도 보기 싫었어요. 종이 조차, 볼펜 조차, 아끼던 만년필 조차 내 곁에 못오게 강하게 거부 했습니다.



정말 이러다 철저하게 무너져 버려서 끝도 없을 땅굴을 파고 들어갈거 같았어요.



나는 내가 보호자고


아이에게는 유일한 보호자가 나였기에 땅굴을 파서 나오지 못하고 환한 세상을 등질수가 없었어요.



머리를 식힐 겸 그렇게 시작한 소설책은 뜻밖의 길을 안내 해주었습니다. 그것도 한달 넘게 읽고 또 읽으면서 되새김질하고서야 그 길을 알거 같았으니까요. 마음이 시키는대로 내면의 소리를 들었을뿐인데... 시리고 아픈상처, 꽁꽁 숨기고 숨이 넘어갈듯 말듯한 그곳의 상처를 보고 말았습니다.



'사랑' '19세 구독불가' 문구를 보며 지금은 '39금' '49금'도 상관없는 심정이었습니다. 내 나이가 벌써 중년의 중심에 서 있었으니까요. 벌써 출산을 3번 경험했고 볼걸 안볼거 다 본 인생 경험자이자 미숙한 사랑의 소유자이니까. 충분히 배워야 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누구나 미완성인 인생을 살아가지만 저는 사랑도 미완성에 시작해 실패의 고배를 두번 마셔봤고 내 목숨보다 아끼는 아이들을 보내줘야 했으며 내 몸을 아끼지 않고 함부러 학대한 바람에 아프기까지 했어요. 철저하고 지독하게 인생의 미완성을 맛보고 있었기에 남들보다 조금 늦게 시작하고 늦게 걸어간다고 한들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그 고지에 서있을거라는 건 믿음과 신뢰가 있었고 넘쳤죠. 마땅히 그래야만 하고요. 혼자 몸이 아니니까요.



'책에서 자신을 사랑하면 세상이 환하게 밝아진다' 말을 처음보고 들었을때 강한 저항이 왔고 내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는것조차 참 오글거렸어요. 스스로 내 얼굴을 비난하고 상처를 주는데 누가 나를 이뻐하겠어요. 이런 감정이 들때 참 쓸쓸했죠. 혼자 남겨진 아이에게까지 그릇된 감정을 분출할거 같아서 사랑을 다시 배우라고 가슴이 시키더라고요.



'그래 사랑을 다시 배워보는거야' 그렇게 다짐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웠어요. 사실, 이렇게 다짐하기까지 강하게 거부했어요. 그건 더는 사랑 따위에 발목 잡히기 싫었으니까요. 상처가 깊었으니까. 하지만 소설을 접하고 밥먹는 시간 조차 아까울 만큼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내면서 일이 터지고 또 터져도 내 마음을 달래주는 건 소소하게 다가온 로맨스 소설이었습니다. 가상일지라도 어딘가는 절절한 사랑을, 어딘가는 아픈 사랑을, 어딘가는 아름다운 사랑을 할 거 같았어요. 거기에 저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치도록 뛰었고 설렜죠.(사실 로맨스 소설은 재벌 3세가 나와서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기는 했어요.ㅎㅎㅎㅎ)



20대 사랑을 알고 첫사랑을 만났을때의 아찔함과 설레임, 그리고 두려움까지 함께 밀물처럼 다가온 그때가 떠올랐어요. 저의 첫사랑을 말하자면 배우 공유를 닮았거든요. 매력적인 남자였어요. 나를 참 많이 사랑해준 그 사랑을 소설에서 찾았어요. 저의 첫사랑은 이룰수 없는 사랑이였으니까요. 첫사랑 만난 그 감정이 그대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가 밀물처럼 가슴에 들어오더라고요.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말이죠.



소설책을 읽을때는 지금 내가 아니라 소설책의 주인공이 되었죠. 특히 로코 (로맨스 코미디?)를 읽을때마다 감정을 주체 하지 못했어요. 오늘 새벽에 다 읽은 '웨딩드레스를 벗기는 방법' 요안나 작가 책이었는데요. 오후 12시에 일어난 아이가 미역국 먹고 싶다고할 때 가슴이 요동이 쳤습니다.



내가 간절히 찾고 바라는 것이 바로 '로코였고 사랑이었고 로맨스라는 책을 원하고 있었구나'를 작가 후기를 읽고 주체할 수 없었어요. 그 당시 들었던 감정과 기분를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거든요. 바로 노트북을 켜고 뭔가를 써야할거 같다는 감정과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어요.



그러나 아쉽게도 아이의 배고픔을 호소해서 주방으로 가야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못마땅했습니다. 나는 배고픔을 참을 수 있는데 아이는 아니니까요. 내 감정이 지금 중요하듯 아이 배고픔 즉, 의식주 해결이 가장 중요하니깐 미역을 깨끗이 씻고 소고기를 녹혀 미역국을 끓였습니다.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순간에도 머릿속에 잠식한 감정과 느낌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걸 어떻게 막을 수도 잊을수도 없었어요. 키워드만 되내이며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거든요. 그래야만 하고요. 처음 든 감정과 느낌은 다시 떠올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은 보석과 같은거니까요.



설거지하거나 요리할때, 그리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으면 많은 감정과 많은 생각들이 끊겨버린 필름처럼 스쳐지나가는 경험을 종종해서 참 난감했어요. 고무장갑을 낀 상태에서 폰을 열수도 없고 그렇다고 종이에 쓸 수도 없는 상황이 아찔했어요. 설거지나, 요리등 무의식속 감정을 떠오르기에 가장 좋은거 같아요.



그 어떤 걱정이나 생각을 침법할 수 없는게 바로 설거지와 요리인 단순 노동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아요. 제가 딱 그렇거든요. 밥을 먹다 지나간 병원생활에서 키워드를 찾았죠. 바로 '해독주스로 병든 환자가 찾아왔다' 제목을 연재한 브런치에서 조회수가 1만을 넘기고 말았으니까요.



그래서 책에서도 영상에서도 멍하게 앉아 있거나 명상을 하라는 거 같아요. 상념을 떨쳐버리고 감정도 지우고 그저 현재 이 상황을 자각하지 말고 오로지 머릿속을 텅 비워버리면 텅빈 공간에 또 다른 것들이 채워지는 원리인거 같았어요. 아이와 밥을 먹을때도 아무런 생각없이 먹어야 맛도 있고 설거지 할땐 오로지 설거지에 집중하다보면 무의식에서 들끓는 감정을 마주하게 되더라고요. 곯아 터진 그 상처를 마주는 하는 시간, 그래서 생각지도 못한 기억을 떠오르면 멋진 글이 탄생되더라고요.









웨딩드레스를 벗기는 방법




어제 읽기 시작한 요안나 작가 '웨딩드레스 벗기는 방법' 오늘 새벽에 1,2권을 완독하고 스쳐지는 생각이 바로 이거 였어요.



원고를 거부하고 내가 쓴 글도 못 읽을 정도로 거부는 지금,


글 쓰는 걸 진저리치며 외면한 지금,



'사랑'이라는 단어로 시작하면 글을 이어갈 수 있을 거 같았다는 생각을...



더는 상처 받지 않기 위해 한 방어 기질은 친아버지에게 받은 상처가 고스란히 살아 숨쉬고 있어요. 아직도 아버지를 미워하고, 생각하고 있구나! 이 감정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어요.



웨딩드레스 벗기는 방법 책에서 여주가 아버지를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었어요. 외면을 받으면서도 사실을 딸이 알면 상처 받을까봐 말하지 않고 10년동안 딸의 외면을 끌어안고 지내는 부녀 이야기를 읽었을 때 가슴이 먹먹했고, 내가 찾고 있던 부모의 사랑을 여기서 찾았어요.



저는 아버지에게 철저하게 무시를 받고 방임을 받으며 성장했어요. 그러니깐 책에 나오는 여주의 부모와 정반대라고 해야할까요? 자신의 상처보다 자식의 상처를 보듬어 줬으면 하는 이상적인 아버지를 '그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을텐데라는 원망이 가슴 깊숙한 곳에 껌처럼 붙어서 떨어지지 않고 마음과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었어요.



글을 쉼없이 써내려가면서 치유했다고 미웠던 아버지를 떠나보냈다고 생각한것이 착각이라는 걸 깨달았을때 아차 싶었어요. '아직 아니구나! 아직 그 사람에게 미련이 남았구나! 용서를 빌어라고 나와 여동생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싹싹 빌어야 한다'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치고 있더라고요.



부모는 그러면 안된다고 자신의 상처보다 자식이 받은 상처가 우선이여야 한다는 13살 아이와 30살 성인 여자가 울고 있었어요. 엄마를 힘들게 했고 자녀를 시궁창에 쑤셔넣고도 내 몰라라한 그 사람을 용서는 커녕 분노로 인해 활활 타오르다 못해 스스로 꺼지기를 반복하며 흉터가 되어 보이더라고요. 로맨스 소설을 읽고 꺼져가던 불씨가 다시 활활 타올랐습니다. 분노의 불씨를 아름답게 꺼지게 해야 했습니다.



진정으로 떠나보내야만 원고를 수치심없게 바라볼 수 있을거 같았고


그들이 용서를 하지 않아도 나 자신에게 만큼은 스스로 용서하고 달랠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로맨스 소설을 읽다보면 일맥 상통하는 느낌이 있어요.


자신의 감정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거죠. 그 감정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 시궁창에 빠지거나 돌다리에 걸려 넘어져서 스스로 한계를 짓고 이 세상에서 최고로 쓸모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도망가더라고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그야말로 축복인데 말이죠. 축복인 그걸 왜곡하고 버리고 눌려버려서 스스로 값어치 없는 인간으로 치부해버리고 상처를 내고 아파 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저는 로맨스 소설을 갈증이 해소될때까지 읽고 또 읽을거예요. 아직 갈증이 나서 미치겠거든요. 자신를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가오는 사랑을 왜곡된 감정으로 놓치고 싶지 않아서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고요.



드라마 보다 소설책을 읽다보면 내가 원하는 밑바탕에 화려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마침 내가 원하는 여주와 남주를 그리고 그 주위 배경을 수를 놓으면 하염없이 근사하게 일렁이거든요.



자신을 믿지 못하면 사랑으로 다가오는 그 사람도 믿지 못하고 의심하게 마련이죠.


자신을 신뢰 못하면 사랑으로 다가오는 그 사람을 신뢰 못하고 버리기 마련이죠.


자신을 사랑 못하면 사랑으로 다가오는 그 사람을 밀어내겠죠.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알아야만 다가오는 사랑, 즉 남녀간의 사랑이든 부모자식간의 사랑이든 사물의 사랑이든 자연의 사랑이든 존재 자체로 바라보는 눈이 생기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아무런 의심없이 다가오는 사랑을 한없이 받을 준비를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시간이 많이 걸릴것이고 발을 헛딪고넘어질것이고 다른 길로 걸어가다 후회하겠지만 과거의 실패한 사랑을 되풀이 하기 싫거든요.



저는 사랑이라는 것이 희생만 하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나만 희생하면 그 희생의 댓가가 사랑으로 되돌아오는 줄 알았거든요. 그건 저의 큰 오산이고 착각이었어요. 나라는 사람이 없는데 사랑을 어떻게 받겠어요. 받을 곳도 줄 곳도 없는데 어떻게 사랑을 주겠어요. 당연히 주지 않겠죠. 그저 희생하는 한 여인만 보였을거예요. 희생한 여자는 지쳐서 쓰러져 있는 모습에 사랑보단 연민보다 지지리 궁상맞게 보였을거 같아요. 입장을 바꿔보면 말이죠.



그런데 저는 희생했으니 사랑 달라고 했던거 같아요. 감정과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고 그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다리다 사랑은 퇴색되고 말았죠. 그래서 실패한거 같아요.



내가 가진 모성애로 상대의 부족함을 채워주면 원만한 사랑을 받을 거라고, 드라마에서나 받을 수 있는 사랑을 내 옆에 있는 사람이 해줄거라는 생각을 하며 결혼생활을 유지했던 것이 소설책을 읽고 올바르게 깨닫게 되었죠. 한마디로 잘못 된 사랑이였습니다.



아직은 배워야 할 것도 많고 내 감정을 알아차려야 하는 연습이 우선 순위예요. 그러려면 매개체가 필요하고 저는 그걸 로맨스 소설을 선택했습니다.



'LOVE'



'사랑' 을 다시 배우고 시작합니다. 그게 뭐가 됐든 나를 소중히 여기고 존경하고 존중하면서 힘든 일을 어거지로 하지 않고 못한다고 외치면서 내 감정을 알아주고 속삭여줄거예요.



오직, 나만 믿으면서요. 내 감정만 믿으면서요.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고 로맨스 코미디 소설처럼 유쾌하면서도 재고 따지지 않고 내 감정을 알아주는것이 먼저라고 감히 말해본다.



요리하면서 들었던 감정의 글귀는 노트북을 여는 순간 잔잔하게 사라져서 마지막 작가 후기를 읽고 남은 잔류의 감정을 글로 써봤습니다.



뭐가 됐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독자에게 깊은 영감을 주는 사람인거 같아요.



다음 로맨스 소설은 '오빠랑 연해하면' 1~2권이 식탁위에 놓여져 있어요. 머리가 아프고 정신이 옳가미처럼 힘들때 펼쳐보려고 아끼고 있습니다.








오빠랑 연애하면





곧 가장 인상 깊었던 (로소) 로맨스 소설을 소개하는 날을 기약하며 오늘 글을 마무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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