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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빈 작가 Mar 05. 2022

오미크론 치료는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오다

엄마 에세이

문자를 받고 나니 그제야 보건소 담당자가 전화를 했고 코로나 전문 병원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상태를 말하고 약을 먹으면 된다는 말과 함께 아이가 고열로 인해 많이 아프면 재택치료팀이 있으니 재택치료팀으로 전화를 하면 된다고 했다. 근데 전화는 불통이었고 신호가 가더라도 전화는 받지 않았다. "저기요. 보건소 직원들은 왜 전화를 안 받아요. 확진자는 숨넘어가요" "죄송합니다. 확진자 증가로 직원들이 전화를 받을 수 없나 봐요. 일단 병원부터 전화를 해서 지인에게 부탁을 하세요. 약 받아달라고 부탁하셔야 합니다. 현관 문고리에 약을 걸어두고 가면 되거든요. 대부분 확진자들 보니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더라고요. 약을 먹여보고 아이가 고열이 떨어지지 않으면 다시 연락 주세요" 연락을 하면 전화는 받냐고 말했더니 보건소 직원은 답하지 않았다. 확답을 줄 수 없었으니까.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하려고 하던 순간 성격이 급한 엄마가 먼저 전화를 했다.


여니 병원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엄마, 여니와 나는 일반 군으로 분리되어서 재택치료를 해야 한다고 그러네. 그래서 보건소에서 알려준 병원에 전화해놨거든. 3시 전에 약을 찾아서 우리 집 현관에 두고 가면 되는데 지금 약국 갈 수 있어. 지금 우리는 약이 급한데. 여니 먹어야 할 거 같아. 나도 한 첩 먹으면 쑤시는 몸 통증이 가라앉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데. 예전처럼 아프면 바로 병원 가면 금방 치료될 병이 하루 이틀 미루어지다 보니 병은 더 많이 진행이 되면서 더 많이 아픈 거 같아. 그냥 감기나 독감으로 선포하고 자유로이 병원 가라고 했으면 좋겠다. 진짜 아파서 미칠 지경이야. 아이가 아프다 보니 내가 아프다고 늘어질 수 없어서 더 힘들어" "병원이 어디야. 엄마가 약 갖다 줄게" 사실 엄마가 전화 오기 전 동생과 통화하면서 확진이라고 말했고 보건소에서 전화가 오는 바람에 동생에게 부탁했다.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엄마는 괜찮은지 물어보고 검사하라고 말이다. 동생 역시 나와 함께 한 공간에서 밥을 먹고 시간을 보냈기에 동생에게도 검사를 하라고 말했다. 엄마는 동생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한숨을 쉬었다고 했다. 엄마는 나와 여니가 몸살인 줄 알았다고 아니 몸살이기를 바랐던 것 같았다. 검사가 잘 못 된 거 아니냐고 몸살이라서 코로나 확진으로 나온 거 아니냐고 말이 되지 않는 소리만 했다. 가만히 듣던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엄마 나 아파. 검사가 틀렸다면 확진자 전부 오진이게. 검사 결과가 확진으로 나왔으면 확진인 거지. 한 숨 쉬고 신경을 쓴다고 확진이 음성으로 되돌릴 수 없으니깐 신경 쓰지 말고 약이나 가져다줘" 엄마는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딸 말이 맞으므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고 약부터 가져다줘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빛의 속도로 엄마는 약을 주고 갔다. 약을 먹으려면 뭐라도 먹어야 했고 엄마가 장 봐준 우유와 빵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처방받은 약을 먹고서야 한시름 놓게 되었다. 오한과 통증은 오락가락하며 내 몸과 아이 몸을 침범했다. 약을 먹은 모녀는 손을 잡고 잠을 자다 눈을 뜨니 저녁이었다. 다시 저녁을 챙겨 먹고 약을 먹었다. 약을 먹는 순간 온몸에는 힘이 다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몸이 늘어졌다. 아이는 다행히 확진 문자를 받은 금요일 오후 고열은 떨어졌고 식은땀을 흘리며 잠을 자고 있었다. 열을 체크하니 37.7 정상으로 돌아왔고 얼굴 혈색은 예전으로 돌아왔다. 열이 떨어지니 배고픔이 몰려왔는지 아이는 먹거리만 찾았다. 이제는 내가 문제였다. 목은 더 많이 부어 목소리가 잠기다 못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침을 넘겨야 하는데 침을 넣길 공간조차 없는 목구멍이라고 느껴졌다. 콧물과 두통은 하루 종일 달고 살았고 오한과 쑤심은 하루 종일 따라다녔다. 의사 선생님은 증상을 듣더니 "많이 심하네요. 3일분 약을 처방할 테니 약 잘 드세요" 진료가 끝이 났다. 확진자라서 진료비며 약재비는 들지 않았다. 누워 있었도 온 몸은 갈퀴 갈퀴 찢어지는 느낌이 들었고 누워 있는 건지 물 위에 붕 떠 있는 건지 헷갈렸다. 약 기운으로 몽롱했고 기침을 한 번 하면 쉬지 않고 몇 분 동안 이어졌다. 기침을 하면 부어 있던 목은 몇 배로 따가웠고 아팠다. 이러다 죽는 건 아닌지 걱정이 몰려왔다. 글로 풀어야 하는 통증을 제대로 표현되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입안이 헐었고 냄새는 맡지 못해서 음식 맛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밥이니깐 먹었다.


수요일부터 증상이 심해지더니 목요일부터는 몸져누워버렸고 일어날 수 없었다. 약을 주고 간 엄마는 다시 전화가 왔다. "너희 뭐 좀 먹어야 하는 거 아니가?(부산 사투리)  돼지국밥 사다 줄까?" "엄마 아니야. 여니가 기력이 없어서 갈비탕 끓이려고 갈비탕 고기 사다 놨어. 그러니 걱정하지 마. 약 먹어서 그런지 잠이 많이 와. 자고 일어나 끓일 거야. 여니가 열이 많이 나서 입안이 까끌거려서 안 먹더니 지금 열이 내려서 음식을 찾네. 내일 시간 되면 여니 간식 사다 줘" "내가 가서 해 줄 수도 없고 이걸 어떻게 하노" "죽지 않을 거니깐 걱정 마. 약 먹었으니깐 약 기운을 빌려 갈비탕 끓여놓을 거야. 독한 약 먹으려면 좋은 음식 먹어둬야지" "그래 알았다. 잘 챙겨 먹어라"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 끊었다. 또 눈이 감겼다. 아이는 정상 체온으로 돌아와서 그런지 힘이 나는 거 같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늘어지고 또 늘어지면서 눈이 떠지지 않았다. "엄마 언제까지 잘 거야"라는 아이 말이 들려 떨어지지 않은 눈을 억지로 떴다. "여니야 뭐 먹고 싶어? 뭐 줄까? 지금 냉장고에 도넛이랑 우유뿐인데 그거 먹을래" "아니, 심심해" 아이는 심심하다고 했다.


혼자 티브이 보는 것이 재미없다고 엄마가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여니야 엄마가 약을 먹어서 그런지 힘이 없어. 조금만 더 자고 일어나서 놀아줄게. 혼자 놀면 안 될까?" 아이는 혼자 놀기 싫었지만 엄마가 아프니깐 알았다고 했다. 목요일 확진자로 통보를 받고 점심 약과 저녁 약을 먹었다. 아이는 의외로 차도가 빨라서 회복이 빨랐지만 백신을 접종한 나는 더디게 회복이 되었다. 약을 먹은 여니와 엄마인 난 일찍 감치 잠자리에 들었고 아침에 눈을 뜨니 여니는 더는 열이 나지 않았다. 아이 눈동자는 또렷하게 돌아왔다.  다행이었다. 아이가 자신의 컨디션으로 돌아와서, 음압 병동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목이 아파 목소리가 더는 나오지 않았다.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몸짓과 발짓으로 아이와 소통을 했다. 약만 먹으면 아이와 나는 자야만 했다. 일요일까지 몽롱한 상태에서 밥을 하고 치우고 간식을 챙기면서 지냈고 일요일 저녁이 되고서야 씻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해열제로 인해 식은땀으로 몸이 찜찜했을 것이고 나는 말할 것도 없이 엉망이었다.


젖 먹던 힘을 다해 4일 만에 욕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개운하게 씻고 나니 사람 사는 얼굴로 돌아왔다. 확진이 된 후 5일 만에 목소리는 좋아졌고 월요일 되니 가래가 심해졌다. 기침하는 대로 가래가 나왔고 기침 횟수는 줄어들었지만 가래는 횟수가 삼하게 늘었다. 3일분 약이 떨어져 월요일 한 번 더 약을 받아달라고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5일 동안 약으로 버텼다. 오미크론 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코로나 치료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반 감기약과 가래약을 처방했고 위보호제가 전부였고 인후통으로 인해 시럽을 처방받은 것이 다였다. 코로나 치료제가 딱히 있는 건 아니지만 일반 약으로 오미크론 증상이 회복되는 것이 그저 신기했다. 하지만 후유증이 오래간다는 걸 알지 못했다. 1월 자가격리 땐 자가격리 물품을 주었다면 지금 현재는 보건소 직원을 더는 볼 수 없었다. 지원 물품은 없었고 모니터링도 없었으며 보건소 직원의 관리도 없었다. 말 그대로 방치 수준이었고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뉴스에서 확진자가 죽었다는 방송이 왜 나오는지 알 거 같았다. 병원을 가지 못하게 하니 치료를 받을 수 없어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 하는 거 같았다. 온라인으로 음식을 주문 못하는 사람이라면 굶어서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병은 악화되는데 그 어디에도 도움 청할 곳이 없었다. 알아서 해결하는 수준이라고 할까? 아이가 고열이라고 해도 보건소 직원은 전화하지 않았다. 늘어나는 업무에 지친 보건소 직원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라서 더는 확진자를 관리하지 않았다.


해제 하루 전날이 다가왔다. 무사히 잘 보낸 모녀는 그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기력이 소진이 되었고 조금만 움직여도 힘들어서 누워서 지내야 했다. 자동 격리 해제라고 하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에 있는 자가 카트로 검사를 했다. 역시나 두줄이 나왔고 보건소 문자가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보건소 문자를 보면 바이러스 찌꺼기로 인해 3개월에서 6개월 동안 PCR 검사나 신속항원검사를 하면 양성 반응이 나온다는 거였다. 이제는 스스로 자신의 몸을 챙겨야 한다. 확진자가 나온 가정에 동거인은 자가격리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방역 패스도 폐지라고 하니 이제는 코로나와 함께 살아야 한다. 확진자가 되고 나니 상비약을 구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 감기약과 몸살약 그리고 각종 제약회사 해열제와 소화제를 구비하고 성인 상비약을 쟁여두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미각과 후각 손실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짠맛만 느낄 뿐 아무 맛을 느끼지 못하고 있고 냄새를 맡을 수 없다. 냄새를 맡을 수 없다. 한 달이 지나면 조금씩 제 기능이 돌아온다고 하니 시간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 글을 쓰는 화요일은 몸 쑤심과 오한은 사라졌고 두통과 기침은 잦아들었다.


누런 가래가 올라오고 있다는 건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의사 소견은 들을 수 없으니 스스로 진단하고 스스로 체크해야 한다. 이제는 코로나가 언제든 나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조심해도 이렇게 확진되고 마니 말이다. 코로나 시국 3년 만에 확진자가 되었고 확진자 경험을 했다. 다음 주면 아이도 사회생활을 한다. 유치원을 다녀야 하고 유치원을 다니게 되면 철저하게 관리하며 아이 몸 상태를 살피고 나 역시 내 몸을 살피며 두 번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병이었다. 조금 더 체계적으로 확진자를 관리를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역학조사를 했지만 보건소 직원은 역학조사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피아노 학원도 발레 학원도 보건소에서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이제는 걸리면 걸리는 것이고 안 걸리면 운이 좋다고 생각해야 할 거 같다. 이제는 코로나와 동거 동락해야 한다. 예전 감기와 독감처럼 말이다. 이제는 살 거 같다. 목은 여전히 따갑고 아프지만 처음보다는 좋아졌고 체력도 돌아왔다. 봄이 다가오면 마스크 쓰지 않고 꽃 내음을 맡고 싶다. 그런 날이 올 거라고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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