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에게 너무 잘 어울리더라. 그리고 할머니가 무척 기뻐했어.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어"
그렇게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고마움을 전했던 것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가장 잘한 일이었다. 후회가 없으니깐. 수많은 친손녀 친손자가 있었지만 할머니에게 선물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나에게 뜻밖의 선물을 받았으니 감동에 감동을 했던 것이다. 간절기와 환절기에는 내가 사준 스카프를 꼭 하고 성당을 다녔고 자식들 집에 갈 때도 내가 사준 스카프를 잊지 않는다는 엄마 말에 내심 뿌듯했다. 그 선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할머니는 먼 길 떠나기 전 가족들에게 인사를 했다. 관에 똑바로 누운 모습, 이젠 더는 아프지 않을 거 같다는 편안한 모습, 그리고 잘 살아라는 할머니의 마지막 인사를 받으며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입관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자매는 이방인이었으니깐. 그러나 기적처럼 아니 할머니의 유언이라며 입관에 참여하라는 말에 멍해 있을 때 아빠는 "너희들도 할머니 마지막 가는 길에 힘을 보태야지. 입관 때 들어오렴"
무서웠고 이유 모를 가슴이 뛰었다. 죽은 사람을 본다는 건 나에게 큰 용기가 필요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동생은 굳어 있던 나를 보며 손을 잡았다.
"언니야 우리 할머니 보자. 그동안 빈소에서 우리가 한 일이 잘한 거라고 할머니에게 친창 듣고 싶어"
"그래, 가자. 할머니 마지막 가는 길에 우리가 배웅하자"
"응, 아마 할머니는 기뻐할 거야.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엄마 말을 들어보면 우리를 다른 손주들보다 아끼고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하잖아"
입관실 문이 열리는 순간 숨이 멎었다. 사뭇 침잠하고 엄숙한 풍경에 숨을 쉴 수 없었다. 곱디 고운 할머니 모습이 보였다.
'할머니 더는 그곳에서 아프지 마세요. 여기 걱정 마시고 편안하고 행복하게 그렇게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더는 할머니를 뵙지 못하지만 나와 동생 마음 한 곳에는 할머니 사랑을 잊지 않을게요. 부디 편히 쉬세요. 아프지 마시고요' 간절히 기도했다.
할머니 발에는 먼 길 가시기에 편안한 고무신이 신겨져 있었고 발 아프지 않게 버선까지 신겨져 있었다. 조건 없이 줬던 사랑은 이렇게 결실을 맺었다. 엄마와 새아버지 사이는 종결되었지만 내 안에 있는 사랑은 아마도 할머니 사랑을 모르고 지냈던 유년시절을 위해 찾아온 친할머니 사랑이 담겨 있다. 고귀한 할머니 사랑은 간직하고 산다.
핏줄로 연결된 외할머니 사랑보다 핏줄로 연결되지 않은 친할머니 사랑이 끈끈하고 짙었다. 지금도 가끔 할머니 입관 모습을 떠올린다. 할머니 사랑이 있었기에 난폭했던 새아버지와 한 가족으로 살 수 있었다.
부모 싸움으로 상처투성인 나와 여동생에게 할머니는 아무런 말 없이 손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손등을 두들겨 주었다. '다 괜찮아질 거라고 너희들 안위를 하느님이 보호할 거야'라고 눈빛으로 전했다.
나와 종교는 다르지만, 할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며 본 천주교는 멋지고 신뢰가 갔다.
"너희들이 한 행동으로 엄마 어깨가 올라갔어. 빈소에 오시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했던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나 봐. 다들 칭찬하셨어"
"손녀니깐 당연한 거야. 우리가 있을 자리가 거기였으니. 모르는 친척 속에 있는 것보다 빈소 입구를 지키는 일이 마음 편했어"
나와 여동생은 빈소 입구를 지켰던 본질의 이유는 자매가 있어야 할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엄마는 며느리로서 역할하기 바빴고 우리를 신경 쓸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바쁜 엄마를 모르는 척하고 집으로 가면 되는 그 자리 그러나 친척들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할머니는 자매를 사랑했지만 할머니가 떠난 후 이방인은 어디에서든 설 자리가 없었다.
동생을 이끌고 간 곳이 빈소 입구였고 방이었던 빈소 입구는 자매가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손님은 끊임없이 찾아와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 함정이었지만.
동생은 이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설사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고 한들 기억 한 조각만 남겨져 있다면 그 아이도 할머니의 사랑을 알리라 믿는다.
언젠가는 내 부모 입관을 볼 것이고 내 아이가 나의 입관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건 우주의 법칙과 같다. 죽음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머니는 마지막 가는 길에 알려주었다.
외할머니 입관은 보지 못했다. 외손주라서 안된다는 외갓집 식구들. 결국 외할머니가 가장 사랑하는 손자와 6남매만 참석한 입관식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처음이자 지금으로선 마지막 입관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이제 이 감정을 글로 표현했으니 그 모습은 옅어질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가슴에 담긴 추억은 더 또렷해진다는 건 난 안다.
'할머니! 그곳 생활은 어때요? 아프지 않으시죠. 처음으로 사랑을 준 할머니. 할머니 얼굴은 기억나질 않지만 할머니가 주신 사랑, 그 사랑으로 나와 동생은 살 수 있었어요. 이렇게 할머니를 부를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합니다. 그곳에서 건강하세요. 제가 또 찾아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