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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빈 작가 Nov 19. 2022

죽음은 아름답도다. 헛되지 않은 삶을 산 증거

엄마 에세이

아주 오래전 일이다. 새아빠의 엄마 즉, 친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전해 들었던 그때 난 스물 하고도 다섯 살쯤 될 무렵이었다.


삶과 죽음이라는 단어를 그때 명확하게 구분 짓었다. 뼛속 깊은 곳까지 암이 침투한 할머니 몸을 엄마는 쉼 없이 돌보며 힘들어하는 할머니 곁에서 손발이 되었다.


직장을 다니던 나는 엄마 부재로 맏이 역할이 더 많아졌던 터라 엄마 부재가 싫었다. 그렇게 간병인을 하던 엄마와 맏이 사이에서 하기 싫은 일을 도맡아야 했다.


직장을 다녀오면 가족들 밥을 챙겨야 했고 막내 동생 숙제를 봐줘야 했으며 준비물을 챙겨야 했다. 그러던 중 할머니 부고 소식에 마음이 아팠고 부고가 싫었다.


사실 나와 여동생은 그 집에서 인정도 인정하지도 않은 뭐 그런 위치였다. 이런 위치에서 동생과 나는 뭐를 할 수 있었을까 그저 새하얀 상복을 입고 고인의 명복을 비는 일뿐이었다.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했고 직장 동료가 찾아왔다. 아주 큰 금액을 부조한 회사는 나의 체면을 세워줬다. 체면을 세운 일은 새아버지와 살면서 엄마의 뿌듯함이었고 자랑이었다.


동생과 나는 새하얀 상복을 입고 조의하시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입구에 앉아 있었다. 이 행동을 누구로 인해했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다만, 손녀딸로서 최선을 다했다. 새아버지의 가족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행동일지도 모른다.


친할머니의 입관 소식을 전해 듣고 할머니 마지막 가는 길에 그 모습을 눈으로 담았다. 곱디 고운 할머니 피부와 새빨간 입술,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하게 차려입은 옷은 먼 길 가시는 할머니에 대한 예우라고 했다.


이쁘게 화장한 할머니 얼굴에는 아픔이 없었다. 그저 편안하고 평온한 미소가 입가에 머물고 있었다. 엄마가 말한 살아생전 할머니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할머니는 떠나기 며칠 전부터 모든 걸 다 비워냈어. 대변부터 소변 급기야 콧물까지 다 쏟아내시고 며칠 만에 돌아가신 거야"

"침대에 누워 있던 할머니가 헛소리를 하는데 얼마나 놀랬는지 몰라. 팔을 휘저으며 '저리 가. 나 안 갈 거야. 조금 더 있다 갈 거야'라며 할머니가 허공에 대고 말하는데 소름이 돋더라"

"엄마는 그때 뭐했는데?"

"할머니를 깨웠지. 악몽을 꾸는 거 같아서"

할머니 마지막 치료는 마약성 진통제뿐. 살아 있어도 살아 있지 못한 그런 상태였다.


그렇게 일주일을 더 사시다 멀리 떠나셨다. 아마도 내 생각에는 먼 길 떠나기 위해 길잡이가 온 거 같았다.


천주교를 믿었던 할머니 장례는 천주교에 따라 의식이 진행되었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장엄하면서도 웅장한 고인의 마지막 배웅 모습.


사악한 일로 처참하게 죽는 이가 있다면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죽음의 길에서도 대우를 받으며 떠나는 할머니가 그동안 살아오신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할머니 나름대로 걸어온 그 길에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냈고 뜨거운 눈물을 쏟아졌다.


나와 동생은 할머니와의 추억은 없다. 내 나이 열여섯에 새아버지의 가족을 만났고 명절 외에는 친척과 왕래가 없었다. 다만 엄마를 통해 들은 이야기는 "할머니는 너희들을 친손녀로 받아들였어. 이것저것 음식을 챙겨주면서 너희들 잘 키우라고 했다"


엄마는 그 고마움을 내 귀에 딱지 앉도록 말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때는 이혼을 하면 죄인이었고 거기에 자식까지 있다면 사회 인식이 좋지 않은 사회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자식을 데리고 재혼하는 건 하늘에 별따기보다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그런 사회 속에서 엄마는 재혼을 했고 시가집과 시가식구들이 엄마를 며느리로 동서로 가족으로 받아들였고 거기에 우리까지 가족으로 받아들였으니 엄마에게는 그들이 조건 없이 감사했으리라.


첫 월급을 탄 날에는 엄마에게 세뇌된 기억을 떠올렸고 할머니 선물을 사야 했다. 내 위치가 그러했으니깐. 이쁜 스카프를 샀다. 새하얀 할머니 피부에 어울릴 만한 스카프가 백화점 진열대에 진열되어 있었다.


"이거 할머니 선물이야. 첫 월급은 부모와 친구에게 선물하는 거라서 할머니에게 고마움을 이걸로 대신할게. 엄마가 전해줘"


무표정한 엄마 얼굴에서 웃음꽃이 피었다. 선물을 준 다음 날.


"할머니에게 너무 잘 어울리더라. 그리고 할머니가 무척 기뻐했어.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어"

그렇게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고마움을 전했던 것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가장 잘한 일이었다. 후회가 없으니깐. 수많은 친손녀 친손자가 있었지만 할머니에게 선물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나에게 뜻밖의 선물을 받았으니 감동에 감동을 했던 것이다. 간절기와 환절기에는 내가 사준 스카프를 꼭 하고 성당을 다녔고 자식들 집에 갈 때도 내가 사준 스카프를 잊지 않는다는 엄마 말에 내심 뿌듯했다. 그 선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할머니는 먼 길 떠나기 전 가족들에게 인사를 했다. 관에 똑바로 누운 모습, 이젠 더는 아프지 않을 거 같다는 편안한 모습, 그리고 잘 살아라는 할머니의 마지막 인사를 받으며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입관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자매는 이방인이었으니깐. 그러나 기적처럼 아니 할머니의 유언이라며 입관에 참여하라는 말에 멍해 있을 때 아빠는 "너희들도 할머니 마지막 가는 길에 힘을 보태야지. 입관 때 들어오렴"


무서웠고 이유 모를 가슴이 뛰었다. 죽은 사람을 본다는 건 나에게 큰 용기가 필요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동생은 굳어 있던 나를 보며 손을 잡았다.

"언니야 우리 할머니 보자. 그동안 빈소에서 우리가 한 일이 잘한 거라고 할머니에게 친창 듣고 싶어"

"그래, 가자. 할머니 마지막 가는 길에 우리가 배웅하자"

"응, 아마 할머니는 기뻐할 거야.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엄마 말을 들어보면 우리를 다른 손주들보다 아끼고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하잖아"


입관실 문이 열리는 순간 숨이 멎었다. 사뭇 침잠하고 엄숙한 풍경에 숨을 쉴 수 없었다. 곱디 고운 할머니 모습이 보였다.


'할머니 더는 그곳에서 아프지 마세요. 여기 걱정 마시고 편안하고 행복하게 그렇게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더는 할머니를 뵙지 못하지만 나와 동생 마음 한 곳에는 할머니 사랑을 잊지 않을게요. 부디 편히 쉬세요. 아프지 마시고요' 간절히 기도했다.


할머니 발에는 먼 길 가시기에 편안한 고무신이 신겨져 있었고 발 아프지 않게 버선까지 신겨져 있었다. 조건 없이 줬던 사랑은 이렇게 결실을 맺었다. 엄마와 새아버지 사이는 종결되었지만 내 안에 있는 사랑은 아마도 할머니 사랑을 모르고 지냈던 유년시절을 위해 찾아온 친할머니 사랑이 담겨 있다. 고귀한 할머니 사랑은 간직하고 산다.


핏줄로 연결된 외할머니 사랑보다 핏줄로 연결되지 않은 친할머니 사랑이 끈끈하고 짙었다. 지금도 가끔 할머니 입관 모습을 떠올린다. 할머니 사랑이 있었기에 난폭했던 새아버지와 한 가족으로 살 수 있었다.


부모 싸움으로 상처투성인 나와 여동생에게 할머니는 아무런 말 없이 손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손등을 두들겨 주었다. '다 괜찮아질 거라고 너희들 안위를 하느님이 보호할 거야'라고 눈빛으로 전했다.


나와 종교는 다르지만, 할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며 본 천주교는 멋지고 신뢰가 갔다.


"너희들이 한 행동으로 엄마 어깨가 올라갔어. 빈소에 오시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했던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나 봐. 다들 칭찬하셨어"

"손녀니깐 당연한 거야. 우리가 있을 자리가 거기였으니. 모르는 친척 속에 있는 것보다 빈소 입구를 지키는 일이 마음 편했어"


나와 여동생은 빈소 입구를 지켰던 본질의 이유는 자매가 있어야 할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엄마는 며느리로서 역할하기 바빴고 우리를 신경 쓸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바쁜 엄마를 모르는 척하고 집으로 가면 되는 그 자리 그러나 친척들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할머니는 자매를 사랑했지만 할머니가 떠난 후 이방인은 어디에서든 설 자리가 없었다.


동생을 이끌고 간 곳이 빈소 입구였고 방이었던 빈소 입구는 자매가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손님은 끊임없이 찾아와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 함정이었지만.


동생은 이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설사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고 한들 기억 한 조각만 남겨져 있다면 그 아이도 할머니의 사랑을 알리라 믿는다.


언젠가는 내 부모 입관을 볼 것이고 내 아이가 나의 입관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건 우주의 법칙과 같다. 죽음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머니는 마지막 가는 길에 알려주었다.


외할머니 입관은 보지 못했다. 외손주라서 안된다는 외갓집 식구들. 결국 외할머니가 가장 사랑하는 손자와 6남매만 참석한 입관식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처음이자 지금으로선 마지막 입관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이제 이 감정을 글로 표현했으니 그 모습은 옅어질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가슴에 담긴 추억은 더 또렷해진다는 건 난 안다.


'할머니! 그곳 생활은 어때요? 아프지 않으시죠. 처음으로 사랑을 준 할머니. 할머니 얼굴은 기억나질 않지만 할머니가 주신 사랑, 그 사랑으로 나와 동생은 살 수 있었어요. 이렇게 할머니를 부를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합니다. 그곳에서 건강하세요. 제가 또 찾아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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