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혼 후 더 근사해졌다
주말 잘 보내셨나요?
저는 아이가 아파서 토요일과 일요일은 병원 다니고
월요일 학교 갈 수 있게 배숙을 만들며 보냈어요.
추웠다 더웠다 이번 봄 날씨가 오락가락하네요.
그러니 아이 면역력이 떨어졌는지
토요일 아침 목 아프다고 했다가
또 아니라고 해서 토요일은 병원 가지 않았거든요.
근데 토요일 밤 자면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자다 깨다를 반복한 여니가 안쓰러웠어요.
결국 일요일 소아과 하는 병원을 찾았고
아침 일찍 병원 갔는데 대기수가 60명. 후들후들
한 시간 반가량 기다리니 딸 이름이 불렸어요.
여니 목을 보더니 엄청 부어서 빨갛다고 무리하지 말라고
의사선생님이 말했고 일요일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굴뒹굴했어요.
배숙이 가래 기침을 잦아들게 하니 병원 다녀오는 길에
장을 봤죠. 열이 나지 않아서 선생님이 놀라셨어요.
아마 고열로 시달려야 했는데 그동안 먹인 비타민과 항상화 가득한
식품을 먹여서 그나마 열은 나지 않았던 거 같아요.
아이가 아프니 글 쓸 여유가 없었고
저까지 피곤해서 배숙하다 잠이 들었죠.
깜빡 잠들었는데 너무 많이 자서 배숙했던
냄비는 타고 말았어요.
자 이제 저의 세상으로 떠나볼까요?
나는 이혼 후 더 근사해졌다 책 읽어보신 분 계실까요?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요.
호응이 없을까 봐요.
두려움은 허상이니 잠깐하다
말게요.
그럼, 저는 10대때 왜 엄마가 되었는지 그 속으로
들어가 봐요.
10대부터 힘듦을 부딪혀야만 했던
나의 어린 시절 대면.
나를 미워했던 외가 식구들.
그리고 친아빠의 경멸스러운
눈빛이 고스란히 수면 위로 올라왔죠.
너무 미워서
나에게 많은 상처를 준 그들을
마음속 깊은 곳까지 숨겨 두었지만,
더는 숨겨 두어서는 안 될 거 같았어요.
새로운 삶을 원했거든요.
묵은 감정과 때를 벗겨내야만 가능한 새로운 삶.
곁에서 나만 바라보는 딸을 위해서라도
대면을 하고 또 해야만 했어요.
쓰면서 분노했다 화를 냈다 이 부분에서
엄마와의 다툼도 수없이 했었죠.
상처를 준 어린 딸 마음을 공감은커녕
자신의 입장만 내세우는 엄마.
결국 내가 나를 위해 공감을 해야 했고
사과를 해야 했으며 위로해야 했지요.
이 모든 것은 글을 쓰면서 가능했어요.
대면하기 힘들어 이것 빼고 저것 빼고 나니
거짓된 글만 쓰게 되더라고요.
결국 수없이 겪었던
그 시절 그대로 글로 옮겨습니다.
다시 용기를 내고 일단 초고를 작성하며
분노란 분노를 다 쏟아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책이 나왔습니다.
어느 날, 믿었던 엄마가 사라졌어요.
하루 이틀 그리고 오매불망 기다리던
엄마는 오지 않았고 자매는 어디로 향했어요.
그리고 13살 맏이는 동생을 위해
엄마가 되었습니다.
서로 의지하고 살아야만 지옥 같은 집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죠.
13살 맏이는 엄마가 되면서 동생 더러운 패딩이 눈에
들어왔죠. 한 겨울 차가운 물에 패딩을 빨고 또 빨았어요.
그 기억은 작은방에 홀로 남은 자매만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어요. 부뚜막에 앉아 연탄으로 데워진 따듯한 물로
비누 칠했던 기억. 얼어버린 손을 호호 불어가며
동생 옷을 빨았던 기억만 남아 있어요.
아빠는 자매의 생존에는 신경 쓰지 않았어요.
오직 자신 몰래 엄마를 만났는지
전화를 했는지 의심을 하며 자는 나를 깨워
심문하기 바빴던 날들만 가득했어요.
밤이 무척 무서웠습니다.
엄마와 함께 생활할 때도 밤은 무서웠습니다.
어린 아이를 돌봐 줄 어른이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부부 싸움은
어린 자식에게는 무서웠기 때문이죠.
나를 버리고
자매를 버리고
엄마가 견디지 못하고
이 집을 떠날 것만 같았어요.
아마 엄마는 입버릇처럼 떠나고 싶다고 말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니 어린 내가 얼마나 무서워겠어요.
눈을 감아도 캄캄했고
눈을 떠도 캄캄한 밤만 존재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았던 절망적인 그때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경멸에 찬 눈으로 자매를 바라보던
큰 집 가족들. 거지로 취급했던
큰 집 식구들에 치여 밥만 먹으며
체했죠.
눈칫 밥이었으니깐요.
모든 것이 암울했던 10대였습니다.
어느 날, 자매를 구원해 줄
천사가 다ㄱㅏ왔어요.
기적이 일어났던 14살.
외갓집 삼촌과 이모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제야 천국으로 갈 수 있음을.
기적이 일어났음을 직감했습니다.
또 버리고 갈까 봐 이들이 자매 손을 잡아주기를
바라며 어른들 말을 들었습니다.
내 기억에 생생히 남겨진 기적.
기적은 다양한 방법으로 찾아옵니다.
지금 찾아온 기적이
시시해 보일지 몰라도
훗날 돌이켜 보면 엄청난
기적이 되어 있습니다.
자매에게 희망의 끈을 보여준 가족들.
기적을 이루게 해주었던 미국 이모.
수없이 대면해야 했던 10대 나.
내 입장에서 쓴 글이라서 동생 입장은
어떤 느낌으로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같았을 겁니다.
쉽지 않았던 인생의 고비.
고비 고비를 넘기며 순간순간 스며드는 기적은
지금 제가 살아가는 인생일 겁니다.
고비가 생길 때마다 낙담하지 않았던 건
인내심이었습니다.
인내 하나만은 그 누구 못지않게 강했습니다.
불운한 가정에서 버텨야 했기에
엄마 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내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이루어 내지
못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참고 이겨냈습니다.
인내심 하나로 뚝심 있게 그렇게 하루 이틀
내가 서있는 그곳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동생은 늘 저를 보며 말했어요.
"언니는 한다고 하면 꼭 하고 말더라. 난 결과가
나오기 전 포기할 때가 많은데 언니는 정말 대단해"라고요.
정말 저는 한다고 하면 그게 내가 좋아하는 일이든
아니든 끝까지 끌고 나가는 힘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죠.
아픈 몸으로 홀로 아이를 키운다는 건
절망적인 인생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길만이 나를 살리고
아이를 살리는 길이라고 확신했고
힘들어도 밀고 나갔습니다.
결국 이루어 냈고요.
절망적일 때 저의 인생은 더 강했습니다.
나락으로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다시 일어나는 힘은 아마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진 힘이었습니다.
제아무리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이겨내라고 '인내심' 하나만
남겨준 거 같습니다.
이 모든 내용 책에 실었습니다.
생생하게 적힌 나는 이혼 후 더 근사해졌다
꼭 읽어보세요.
다시 살아날 수 있는 힘을 얻을 겁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