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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빈 작가 May 03. 2023

그리움을 안고 다시 일상 속으로 걸어갑니다.

동생을 먼저 보낸 언니 마음

마음을 다 잡기 위해 오늘도 난 정리를 한다. 그 아이를 떠나보낸 지 2주가 흘렀지만,

어디를 가던 무엇을 먹던 그 아이가 떠올라 한동안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이틀 동안 빈소를 지키며 그 아이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뭐가 그리 급해서 벌써 그곳에 갔냐며 억울함과 원망이 섞인 울음에 나는 다시 마음을 다 잡고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영정 사진을 보며 용서를 빌었다.


그 아이는 웃으며 '괜찮아 언니야. 그럴 수 있지. 난 괜찮아. 미안할 필요도 힘들어할 필요도 없어. 언니는 언니가 서있는 자리에서 나에게 최선을 다했어'라고 말하는 거 같았다.


'고마워! 너무 고마워. 언니를 이해해 줘서. 여기서는 많이 아팠지만, 거기에서는 아프지 말고 너 하고픈 거 원 없이 했으면 좋겠어. 그 누구도 눈치 보지 말고 원 없이 말이야' 그 아이가 원했던 것을 말해주었다. 말없이 웃고 있던 그 아이는 어느 순간 사라졌다.


'삶이란, 신비한 챕터를 한 장 더 넘기게 되는 거. 나에게 온 역경과 고통을 주었으며, 가족을 잃은 슬픔을 일찍 감치 안겨주셨던 것은 옳은 일이었다. 조금 더 성숙하라는 의미이며, 가족에 대한 사랑을 조금 더 알아가기를 그 아이는 원했는지 모르겠다. 그 아이를 잃고 난 후 일상으로 돌아오면서 난 이제야 겨우 약간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또 하나의 배움이 감사하다'


슬픔을 언제까지 나를 휘감고 살아갈 것인가? 그건 나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슬픔은 슬픔대로 흐르게 내버려 두고 내가 가야 할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은 천천히, 때론 늦게 가겠지만, 나는 나에게 온 슬픔을 이겨내려고 나만의 방식대로 가기로 결정 내렸다.


오래된 그 아이 사진을 보며 이제야 그 아이 내면을 볼 수 있었다. '외롭고 쓸쓸한 모습을 뒤로 감추고 잘 웃던 그 아이 내면은 늘 외로웠다' 그 아이 사진을 보며 마음이 미어졌다. 친구를 사랑했으며 한번 맺은 인연을 놓지 않고 함께 갔던 그 아이를 기억하는 이가 많았음을.. 그때 그 아이가 부러웠다. '너 참 잘 살았구나. 가족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넌 너만의 방식대로 다른 이에게 사랑을 주고받고 있었구나. 언니가 미처 너의 아픈 마음을 다독여주지 못했어. 언니를 용서해 줄 거지. 언니의 미흡한 부분을 이곳에서 잘 맺고 훗날 너한테 갈 때 환하게 웃으며 맞아줘'


빈소에서는 엄마와 나 그리고 동생이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 같았다. 그 아이는 모녀가 모여 웃고 즐기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그래서 그런 사진이 많았는데 이번에도 그 아이가 바라는 대로 빈소에는 그 아이의 남편과 딸이 지키는 것이 아닌 나와 엄마가 지키며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러던 중 엄마는 "환하게 웃으며 그 아이가 이렇게 말하는 거 같아. '맞제, 엄마'라고. 여기 있겠지" 말했다.


그립고 그리운 그 아이와 작별을 하며 참 많이 울었다. 살아생전 더 잘해주지 못함에 대한 반성의 눈물과 그 아이가 먹고 싶다는 잡채를 해주지 못하고 하루 이틀 그 아이 보러 가는 걸 미룸에 대한 반성의 눈물이었다.


나의 슬픔은 제부나 조카에게는 보기 싫은 장면일 것이다. 하지만 난 그 아이에게 용서를 빌었던 눈물이었다. 아직 정리하지 못한 그 아이 물품들. 언제 정리할지 모르겠다.


각자 가정을 꾸리면서

성격이 다른 이유로

인생이 달라서


점점 멀어졌던 자매는 각자 가정을 꾸리기 전까지 동생은 나를 엄마이자 친구로 따랐다.

언니가 결혼하고 첫 조카가 생기면서 빈번하게 집으로 찾아오던 그 아이는 아이를 무척 사랑했다.


아낌없이 사랑을 준 이모를 기억하는 내 딸은 눈시울을 붉힌다.


가슴에 묻어 두어야 할 일이 또 생겼지만, 이 또한 살아지리라.

새로운 챕터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건 없었는데.


늘 내 생각과 다르게 흐르는 것이 인생임을.

지금 여기 내가 그 아이에 대한 글을 쓰면서 감사함이 저절로 나온다.

그 아이에게 주지 못한 사랑을 이제야 깨닫고 줄 수 있어서.

너무 늦었지만, 아마도 하늘에서 늦지 않았다고 말해줄 것만 같다.


다시 글을 쓰는 지금,

그리운 글 일지라도

아픈 상처를 다독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글이므로

지금 나에게 최선의 방법이다.


현재를 살아갈 수 있게

제동을 걸어주는 것이 바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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