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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빈 작가 Jun 08. 2023

타인의 감정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방법

명상하며 나를 알아가기

납골당 추모관



지난 토요일 동생 49재

잘 보내고 왔습니다.

벌써 동생이 떠난 지 49일이 지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요.

하지만 현실을 인정해야만

미래가 보일 테니 현실을

인정하는 연습 중이에요.


그 아이는 살아생전 그 모습 그대로

해맑게 웃고 있었습니다.


엄마와 저만 가려고 하다 삼촌과 숙모가

동행해 주셔서 큰 힘이 되었어요.


아무래도 엄마는 그곳에 잠시 머물다 챙겨 온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싶었던 거

같아요. 납골당 측에서 운행하는 버스로 이동하려다

보니 시간이 아주 촉박했거든요.


30분 정도 참배 후 음식을 나누어 먹을 수 없는

시간이었고 제사를 지내고 곧장 집으로

발길을 옮겨야 했어요.


상황이 이러다 보니 엄마는 엄마 동생에게

부탁해 보겠다고 하셨어요.

저야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상황이라서

엄마가 하고픈 대로 하시라고 했죠.


삼촌이 흔쾌히 허락을 해주셨고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토요일은 하늘이 정말 청명했어요.


멀리서 보면 미세먼지가 가득했지만

가까이서 보면 정말 푸르른

하늘이었습니다.

엄마는 엄마의 억울함을 저에게 말하면서

속상함을 표현했어요.


살다 보면 억울함과 속상함이

없을 순 없지요.

그러나 현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은

 제가 봐도 속상하고도 남을 만큼

억장이 무너지는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추모관 납골당



함께 온 삼촌과 숙모가 엄마 마음을

다독여 주며 잊어버리는 것이

엄마 정신 건강에

누나 정신 건강에

형님 정신 건강에 좋은 거라고

말했지요. 엄마 역시 머리로는

 이해했다고 하지만,

마음으로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가 위패 모신 곳으로

갈 수 없었던 거 하늘에 있는

엄마 작은 딸이 다 이해할 거야.

그러니 그만 속앓이 했으면 좋겠어"

근데요. 그게 참 말처럼 쉽지 않아요.


이제는 한 가족이 아니기에

이제는 남이기에

남이 엄마를 챙기겠냐고 말했어요.


냉정하게 말한 거 같지만,

이러지 않음 엄마는 자신 스스로

포기할 때까지 언제 어디서든 그 상황을

곱씹으며 자신을 힘들게 한다는 걸 제가

알거든요. 저도 엄마와 같은 기질의 소유자라고

밝히고 싶지 않네요.


지금도 엄마는 머릿속에 가득 채워진 상대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가득할 겁니다.

저도 이런데 엄마는 더하겠지요.


30분 참배 후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대화에

울다 웃다 하며 보냈습니다.


숙모께서는 여니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저에게 제안을 하셨어요.

하룻밤 자고 가라고..


저는 사실 집이 가장 편한 사람이에요.

근데 삼촌과 숙모께서 처음으로

저에게 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복용해야 할 약과 챙겨야 할

 물건들을 챙기기 위해

차는 집으로 향했습니다.


삼촌과 숙모께서도 힘들 텐데 가자고 조르셨어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서기로 했고 혼자 있을

엄마가 걱정되어 제가 또 설득했습니다.

집에서 울지 말고 삼촌 집에 가자고요.


엄마 역시 집에 가면 자신의 모습이 어떠할지

아시는 눈치였습니다.


"형님 집에 있지 말고 저희 집으로 갔다가

 형님 가게로 데려다 드릴게요."라고

숙모가 거들어 주셨죠.


거기에 더해 삼촌까지 엄마를

안심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요.

사실 엄마는 이날 저녁 가게에

나갈 참이었거든요.

그걸 아는 저와 삼촌 부부.

가게 쉬어라고 말하면 아마도


엄마는 거부 반응으로

삼촌 집에 가지 않겠다고 할 엄마거든요.


그러니 모두가 엄마가 가게

갈 수 있도록 안심시키는

말로 위장했어요.


어찌어찌 모두 모인 친척 모임.

둘째 삼촌과 숙모

그리고 조카와 사촌 동생과 제부.

한자리에서 모이게 된 거죠.


모두 모이니 가족만 11명이 되었어요.

70평형의 아파트에 방만 6칸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수 있는 방까지 있는 삼촌댁.


오랜만에 자신의 집에 온 누나에게

뭐든 해주고 싶었던 삼촌.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회로

엄마를 꼬시는 삼촌.

결국 엄마는 못 이기는 척하며

 삼촌과 함께 회를 사러 갔죠.


그렇게 저와 동생만 남은 상황이

 너무나 어색했습니다.

 인연을 끊고 산 세월만큼

침묵이 말해주는 거 같았죠.


그러다 이제는 나도 일을 해야 하는데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다는 말을

필두로 서로 오고 가는

대화에 꽃이 피었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다 보니

어르신들이 회 센터에서 오셨고

상다리 부러지도록

차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삼촌과 숙모 그리고

엄마가 늙었음을 그날

더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동생과 내가 40대가 되었으니

부모님들도

칠순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그제야 실감하게 되었죠.

동생과 저는 부모님이 사 오신

음식을 차리며

어른들을 도와드렸습니다.


그렇게 밤은 깊어가고 삼촌은 누이가

가게 가지 않았으면

하는 눈치였고 곧바로 운을 떼었죠.


"그냥 오늘 하루 쉬어. 현이 49재 때

가게 가봤자 누이 마음만

더 아프니 여기서 아이들 재롱 보면서 웃자"


저도 거들었고 숙모도 거들어 주셨어요.

 동생까지 합세하니

그제야 엄마는 못 이기는 척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동생 부부와 함께 했습니다.

또 엄마는 장례식장부터 간직해 온

섭섭함을 모두에게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삼촌은

 손주들을 재워주셨고

여자들만 주방 식탁에 모여

새벽 3시까지 수다가 이어졌죠.


숙모와 삼촌은 저를 어릴 때부터

다른 조카보다

아꼈고 사랑했다면서

 말을 이어갔습니다.


제가 갑자기 연락 두절까지 하는 모습에

어른들이 가진 섭섭함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잘 살 것만 같았던 조카가

 갑자기 연락 두절을 하면서 친척들을

 보지 않으려 하는

저의 모습에 많이 놀랐다고 하셨죠.


그동안 내가 왜 그랬어야만

했는지에 대해

내가 살아온 삶을 아주 조금,

일부분만 말했습니다.

숙모는 저의 말을 경청하면서

본인이 느낀 감정

 그대로 토해내셨죠.


"영아야 나는 네가 우리와 인연을

끊으려고 하는 모습에

놀랐고 우리가 언젠가 마트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너의 그 표정이 뻣뻣했어"

숙모는 그 당시 느꼈던 감정을 말로

 표현하며 표정까지 연출하셨죠.


저는 그 당시 내가 재혼을 했고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은 후라서

친척들 볼 자신이 없었어요.

아주 나약한 여자로 변해 있었으니 말이죠..

나를 믿지 못하고

나를 신뢰하지 못했으며

내가 일구어 낸 가정이 형편없었으니

자신감은 땅 깊숙이 처박혀 있었습니다.


잘 나가던 내가

예쁘고 똑똑했던 조카가

어른들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저 자신을 숨기고 싶었죠.

누가 나를 해치려고 달려들어도

나를 믿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했다는 걸 몰랐어요.


이름 석 자만 사라지면

잊힌 사람으로 남겨져 있을 거라는

아주 나약한 생각을 했으니 말이죠.


한 번의 실패에 불구하고

다시 재혼한 내가

괜찮은 남자와 살아야 했었는데

그것마저 불행 속에서 살았으니

자신감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거기다 늦은 나이에 아이까지 낳아

 살아가는 조카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단정 지었던 저였습니다..


덜 성장한 내 감정에

휩쓸러 살아갔었죠.

그때 그 시절 저를 아주 부끄러운 존재로

여겼습니다.


피하고 싶은 걸 들켜버린 어린아이처럼

인상은 굳어졌던 건

나를 지키기 위함과 함께

 방어 기질이 나왔어요.

그 방어 기질과 민망함이 동시에

 묻어난 얼굴에는 다른 이가

보기에는 건방지게 보였는지도 모르겠고요..


저의 표정 한 부분 중 건방지거나

급속도로 변해진 조카 모습 일부분을 숙모는

숙모 기억 속에 저장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건 오해이고 거만하게 한 행동이 아니라

너무 놀라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몰라서 했던

표정이었을 거라고 그 상황에 대한 설명을 했어요.


잘 사는 모습,

다시 일어나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던

내 모습이 어른들 눈에는

 그렇게 보인 거 같다고 말했죠.


이렇게 우리는 대화하지 않으면

자신의 왜곡된 기억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말지요.


이렇게 운을 떼고 며칠 전 저희 집을 방문해

이런저런 물건을 챙겨가시면서 모녀가 살아가는

모습이 짠했고 폐쇄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으로

어른들 눈에 비친 거 같았어요.


저는 폐쇄적인 삶이 아니라

나와 맞는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었는데 말이죠.


나를 힘들게 하는 가족들 모두 끊어버리고

엄마와 저 그리고 아이만 공동체로 이루게 했던 것이

그들의 눈에는 저를 폐쇄적으로 보였나 봅니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 기준으로 말이죠.


하룻밤 지내고 집에 오니

나는 폐쇄적인 삶이 아닌

나를 위한 삶을 살아간 건데

그 감정을 나에게 왜 전달하셨을까?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생각에 잠기며

명상에 들어갔죠.


곧장 답이 나왔습니다.

어른들 감정에 의해 나를 폐쇄적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 거라고.


폐쇄적인 삶으로

바라본 건 어른들 느낌이고 감정이다,

난 나와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었고

그건 폐쇄적인 삶이 아닌 온전히 모녀가

살기 위함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작은 삼촌 내외분은 아주 광범위하게 가족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는 분들입니다.


자신이 한 행동이 잘못되었을지라도

자신으로 인해 가족들이 곤경에 처해

손해를 입혔더라도

주눅 들지 않고 일을 처리하며

자신을 인정할 수 있는 멘털이 강한 분,

자신감이 넘치고 자존감이 넘치는 분이었죠.


실수를 하더라도

스스로 자신을 인정하고

다시 가족 품으로 스며드는 모습에

저도 이번 계기로 배웠습니다.


자존감이 높은 분들이 저를 바라볼 때

아마도 두루두루

살아가면 되는 것을 친척들을 모두

차단하고 만나지 않으려고

하는 조카와 조카 손주 모습이

폐쇄적으로 느껴진 거라고

저는 저의 입장에서 합리적으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곧이어 저는 어른들 감정을

내 것으로 가져오지 않으면 되는 걸로

결론을 내렸고요.


'폐쇄적인 삶'으로 저의 삶을

 단정 짓고는 자신이 사시는

동네로 이사해서 두루두루 어울려

지내라고 하셨어요.


아이 교육을 위해서라도

함께 지내야 한다고

한 말에는 공감했습니다.


외갓집 식구들을 멀리하고

인연을 끊으려고 했다는 건

심적으로 정신적으로

정말 힘든 부분이에요.

그리고 단절된 삶으로 돌입했을 때

참 쓸쓸하고 외로웠습니다.


바라보는 가족보다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결정과 행동을 한

당사자인 제가 더 힘겨웠고

쉽지 않은 길은 분명했으니 말이죠.


친척들 가까이 가기에는

내 삶이 평탄하지 못했고

지금도 쉽지 않은 삶을 택

했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언제까지 나를 숨기고

살 수 없는 상황이

동생으로 하여금

조금 빨리 다가왔어요.


그걸 탓하기보단 동생에게

 고맙다고 너로 인해 내가

다시 가족들 품으로

 돌아왔다고 장례식 내내

영정 사진을 보며

감사함을 전했어요.


"이혼이 뭐가 어때서, 너를 숨기고

폐쇄적으로 살아갔니" 숙모께서

제가 처한 상황에 대해 공감해 주셨죠.

공감을 해주는 가족이 있다는 것에

왈칵 쏟아질 거 같은 눈물을 꾹 참고

내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했죠.


"이제는 다 끝났으니 가족과 더불어 살자.

그러니 여기로 와.

형님도 여기로 오세요.

여기 있으면 형님 동생도 덜 걱정하고

우리가 여행 가면 형님은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돼요.

근데 다들 떨어져 지내니

조금 힘들긴 하더라고요.

그냥 여기서 함께 지내요"라고 숙모께서

제안을 했습니다.


숙모 제안에 엄마도 고개를 끄덕이며

 어디로 옮겨야 하나

어디가 저렴한가를 또 논의하게 됩니다.

이렇게 대화는 산 넘어 산으로 가니

새벽 3시가 되도록 결론이 나지 않았어요.


여기서 내가 중단하지 않음

날밤을 샐 거 같아

"우리 언제 자요? 새벽 3시인데"

어른들은 놀라면서 벌써 새벽 3시 이냐며

일단 자자고 하셨죠.


이젠 나와 엄마만 결정하면 되는

 문제로 넘어왔어요.

엄마는 안 되는 것에 집중하며 부정 언어를

쉼 없이 했죠.


그러면서 자꾸만 큰 평수 뭐 하러 가냐고

 월세는 어떻게 감당하며

저를 다그치고 부정적인 언어와 감정으로

제가 포기하기를 바라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엄마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사촌 동생과 함께 부동산을 알아봤습니다.


어디를 가든 월세 5~60만 원은

기본이었습니다.

동생 49재 전전날 내가 살고 있는

 거주지 부동산

시세를 알아보니 얼토당토않은 금액으로

 거래가 되고 있었어요.


그렇다면 삼촌이 사시는 거주지의

부동산이 저렴했습니다.

더 큰 평수에 같은 월세.

내가 살고 있는 동네보다

훨씬 저렴했습니다.


모든 건 내가 생각하면 현실이 됩니다.

사촌 동생 근처로 이사를 하면

내가 일을 할 수 있는 장점.

그러나 가족이 모여 살다 보면

자유롭지 못하는 단점이 존재합니다.

단점은 살아보지 않고 그저 내 생각

내 감정으로 판단한 거고요.

그러니 일단 가족과 더불어 사는 것도

고려 중입니다.


아이 돌봄 신청하지 않고

그 비용을 가족에게 줄 수 있는 이로운 점.

저는 안심하고 가족에게 여니를 맡길 수 있어서

조금은 자유롭게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장점과

여니 역시 엄마가 언제 오나 불안하지 않은

좋은 장점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숙모와 삼촌 감정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폐쇄적인 삶)

지금 현재 저의 감정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명상에 큰 도움이 되었고

내 것이 아닌 감정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경험이 있으시죠.

예전 나라면 남의 감정까지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내 감정이듯 나를 비난하고

비판하며 행동과 생각을 바꾸려고 노력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알아요.

숙모가 느낀 감정은 나의 일부분이었거든요.


저는 지극히 잘 지내왔고

스스로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운 삶이었습니다.


그동안 가족들과 모두 인연을 끊고 살아간 것이

나쁜 건 아니잖아요. 내 삶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어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기 힘들었음을

어른들은 모르니깐요.


내가 왜? 외가댁 가족을 멀리하고

고립된 생활을 택해야만 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모르니 자신의 입장에서

가장 편안한 방식대로 저를 재단하고

판단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제는 내 삶에 여백이 생겼고 거기에

외가 친척들이 스며드는 과정.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받아 들었습니다.


이유가 어떻든 간에 내 마음이 평온하고

평안하니 서로 다른 기질과 생각을 가진

가족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매일 했던 명상이 이렇게 저의 감정과

 타인의 감정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고

타인의 감정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힘까지

얻게 됩니다.


갑자기 찾아온 깨달음.

어제는 너무 피곤해서 아무 생각 없다

다음 날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니

불현듯 찾아든 타인의 감정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타인의 감정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나를 발견하고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명상이 왜 필요한지 아시겠죠.

명상을 조금 더 깊게 해야겠다는

필요성을 알게 됩니다.











오늘 명상 시작합니다.




참 애썼다.

지친 하루 버텨내느라 힘들었던

당신에게

전하는 말 한마디.


참 애썼다.

그것으로 됐다.

 괜찮은 척하느라 애썼다.


굳이 무얼 보여주려 하지 말라.

당신의 삶은 당신에게

큰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당신이 평온해지길 바란다.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으려 하지 말라.

어디에 있을 거라 착각하고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마라.


당신 안에 머물고 잠들어 있는

 본인에게 말을 걸어라.

여태까지 고맙다고

 참 잘해왔다고

참 애썼다고

그래 참 애썼다.

그러니 그것으로 됐다.


아물지 못해 숨기려고만 했던

 당신의 상처들에게

이제는 말할 때다.


참 수고했다고

참 고생했다고

살아내느라 참 애썼다고

많이도 애썼다.


괜찮은 척하느라 애썼고

버터 내느라 애썼다.

하루하루 견디어 내고

 그리고 이겨내느라

참 애썼다.


어른이 되기 위해서

혼자 끙끙 앓아버린 시간에게도

참 애썼다.


힘들지 않은 일도 억지로 하면서

그것을 이겨낸 나의 마음에게도

참 애썼다.


힘내라는 말을 억지로

이해시켜 버린 내 머리에게도

참 애썼다.


난 오늘도 참 잘 해냈고

내일도 잘 해낼 수 있다.


실수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포기하지 않아서


뒤처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멈춰 서지 않아서

참 잘했다고 말한다.


애써 나에게 매 순간 이렇게

이야기하면 좋겠다.


잘하고 있다.

그래 잘 해내고 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지금 잘 해내고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 더 잘할 수 있다.

불안해하지 마라.

지금 그 기분 탓에

내 삶을 흔들리게 하지 마라.


살아가며 불안하지 않는

사람 하나 없고

살아가며 넘어지지 않는

사람 하나 없으니

우리는 오늘도 세상이라는

원 위에

중심을 잡는 연습을 하고 있다.


또 넘어지고 일어나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니

굳이 무언가 보여주려

하지 않아도 된다.


잘하고 있다.

잘 되어가고 있다.

나는, 당신은 잘 나아갈 것이고

잘 도착할 것이고 잘 이겨낼 것이다.


믿고 나아가면 지금의

말처럼 잘하고

있다는 말이

들려올 것이다.

혹여나 말해주는 이가 없더라도

나에게 내가

말해주라.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 될 것이다.










여러분 오늘도 살아내느라 애썼어요.


결과가 어떻든


내 감정이 무엇이든


알아차리는 거,


그리고 그것을 반복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우리는 훌륭한 삶을 살아가고 있어요.




저는 오늘


이틀 동안 일어난 감정에 대해


정리하고 깨달은 것을 나누었습니다.




오늘도 명상을 하며 기분 좋은 하루,


감사한 하루,


충만한 하루


건강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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