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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유언장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말

에필로그 시간을 아끼는 엄마, 시간을 느끼는 딸

by 치유빛 사빈 작가


마지막 장을 쓰는 날,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촉촉이 내렸어요. 연재하는 동안 몸이 아파 매일 병원 다니며 물리치료를 했지요. 의자에 오래 앉아 있는 분이라면 아실 거라, 생각해요. 거기다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정기검진이 있는 날이기도 했어요. 모든 일정과 컨디션을 돌보며, 과연 내가 약속한 연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 걱정했어요. 하지만, 15화 엄마의 유언장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엄마의 유언장은 단순히 끝맺음이 아니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기는 작은 약속과 다짐이에요.


어느 날 저녁, 딸과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여니가 그만두었던 학원에 놀다 오겠다는 전화를 받았어요. 아침에 비가 내렸거든요. 새로 산 우산을 쓰고 간 딸은 신나게 학원에서 놀다 깜빡하고 우산을 두고 온 거예요.


학원 다녔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일이 나에게는 문제가 되고 말았죠. 아까워 함부로 쓰지 못하는 내 시간을 써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나이 들수록 하루가 빠르게 지나가고, 눈을 감았다 뜨면 숫자가 늘어나 있는 게 나이이더군요.


그 후로 불필요한 시간을 쓰지 않고, 오직 나에게 집중하며 쓴 시간이 10년이 되어가고 있지만, 아직 만족하지 못하고 달리고 있는 상태예요. 그러니 딸의 실수를 품어줄 용기가 없었죠. 오전 시간을 다 써야 한다는 게 불만 아닌 불만이 생겼던 날, 저녁에 하소연을 딸 앞에서 했는지 모르겠어요.


오전 시간은 저에게 꿀 같은 달콤한 시간이기에, 혼자 사색도 하고 그동안 써놨던 메모지를 정리하며 글을 쓰는 시간이 귀하고 소중해서 함부로 쓰지 않고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사용해요.


작은 숨을 쉬며 식탁에 앉아 “사람은 주어진 시간이 정해져 있어. 그 시간만 살 수 있지. 근데 너 대신 학원을 가야 하는 시간을 써야 해. 엄마는 하루가 줄어들어 속상해, 시간을 아끼며 살아. 하지만 너는 아직 시간이 넘쳐흐르니까, 그 시간을 아깝지 않게 느껴지지.”


딸은 엄마 말이 이해되지 않은 표정이었죠. 사람은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말에 의문을 가진 채 “그걸 엄마가 어떻게 알아”라고 묻더군요. 신이 각자 주어진 시간을 정해주는 거라고 말했죠. 딸은 신을 믿지 않는다고 그건 거짓이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사람이 백 살 이상 산다면 지구가 감당하지 못할 거라고, 그래서 신은 사람마다 살날을 정해준 거라고 말했죠. 이미 엄마는 40년 넘게 살았기에 남은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고, 불필요한 일을 줄여가며 엄마를 위해 시간을 쓰고 있다고 말했어요. 너는 아직 시간이 많아 못 느끼는 거라고, 혹시 시간이 흘러가는 걸 느끼냐고 물었더니, 방학 때만 느낀다고 하더군요. 이때는 함께 웃었어요.


엄마는 쇼핑하는 시간이 아까워 가능하면 온라인으로 장보기와 쇼핑하는 모습을 너는 봐서 알지 않냐고 했더니 그제야 엄마가 자신에게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던 모양이에요.


여니와 나눈 그 짧은 대화 속에서, 삶의 시간은 단순히 숫자가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감정의 깊이를 배우는 시간이 되었어요. 그저 시간이 아까워하는 마음과 다른 결을 배운 거죠.


그리고 이 유언장은 끝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더 소중히 여기고,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아가는 시작임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어요.


유언장은 다시 말하면, 시작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동생을 보내고 많은 시간을 가졌어요. 동생은 10년 투병 끝에 병마를 이기지 못했지만, 살아 있는 동안 보여준 사랑은 내게 큰 가르침이 되었어요. 홀로 남겨진 조카를 바라보며 더불어 딸을 보며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어요. 서랍 속 일기의 유언장이 아니라 이 세상 딸들에게 유언장을 써보자고. 그동안 내가 살아온 길을 아름답게 표현해서 글로 남기기로 한 것이 엄마의 유언장입니다.


살아야만 가능한 유언장은 죽음을 눈앞에 둔 이야기가 아니라 다시 시작을 의미하는 글입니다.


지금도 세상이 무섭고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나의 작은 손으로 그들의 손을 잡아 주고 싶어 쓴 글입니다. 아직 어린 딸이지만,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에 혹여 엄마가 없더라도 이 유언장으로 스스로 일어났으면 해서 시작한 작업이에요.


홀로 남을 딸을 위해, 멀리 떨어져 지내는 두 딸에게 바치는 엄마의 마음이자 딸에게 쓰는 편지가 아픈 모두에게 희망을 품고, 세상의 밝은 빛을 보기를.


험난한 인생을 굽이굽이 이어진 산등선을 타고 지금 삶을 얻어낸 저처럼, 나도 이겨냈으니, 너희들도 충분히 이겨낼 힘이 내 안에 있다고 알려주는 글입니다.


당신에게 작은 위로와 위안이 그리고 사랑이 가득 담기를 바라며. 이 글을 끝까지 함께 호흡해 주시고 읽어주신 당신께도, 엄마의 유언장이 작은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촉촉이 내리는 가을비 속에서 엄마의 유언장을 마치며, 이 끝맺음은 다시 시작의 이름으로 당신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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