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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June Jun 04. 2023

카세트 테이프

내가 어릴 적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주고 받았다고 하는 카세트 테잎을 들은 적 있었다. 한국에 계시던 할아버지와 독일에 계시던 할머니는 손으로 쓰는 편지 대신, 본인들의 음성과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해서 서로에게 우편으로 부쳤다. 어릴 적 들은 그 테잎 중 하나에는 열살박이 아버지가 즐겁게 부른 '루돌프 사슴 코'가 녹음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 고운 아이의 복소리가 어버지의 옛적 목소리라는 것에 나도 모르게 쑥쓰러워했었다. 카세트 테이프에 담긴 그들의 사랑은 무척 풋풋하고 아름다웠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뒷산에는 꽃이 피었소. 그대도 보았으면 좋았을텐데."

"사랑하는 여보. 베를린은 아직 많이 춥습니다. 아이들과 몸 조심하십시오."


이렇게나 아름다운 메시지를 주고 받았지만, 사실 그때 그들은 서로로 인해 무척이나 아파했던 때였다. 젊고 잘생겼던 할아버지는 사업을 하고자 했다. 사업이 일찍이 적성에 맞지 않았지만, 그는 이상하리만치 사업가의 길을 고집했다고 한다. 정말 안한 사업이 없었다고 한다. 옷을 꿰매 팔았고, 가스 공사에 쓸 파이프를 찍어다 팔았고, 학원을 하겠다고 아이들을 모으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만지는 장사마다 푹푹 시들기 일수였다.


할아버지는 무슨 꿈을 꾸었던 것일까. 우리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끈 꿈은 덧없이 꺼지기 일수였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는 다음 사업 구상을 위해 다시 사람들을 만나러 돌아다녔고, 그들과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다 어느 이름모를 아무개 여성을 만났고, 그는 그녀와 사랑을 했다.


할아버지의 외도를 알게된 할머니가 처음으로 보인 반응은 용서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마음이 큰 사람이 되자고 스스로에 다짐했고, 아무개와 그 아무개의 딸,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두집 아이를 거두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날, 아무개의 딸아이를 꾀벗겨 목욕을 시키는데, 아니 그 아이의 발가락이 할아버의 발가락과 영락없이 닮았더랜다.


그날 할머니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몇주를 시름시름 앓다 독일로 훌쩍 떠나 버렸다. 돈을 벌겠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사실 그 길은 그녀가 뒤도 안보고 친 도망길이었다. 그렇게 아무런 대화도 없이 할머니는 머나 먼 이국땅으로 도망가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큰 서움함과 상처를 주었다.


그들은 카세트 데이프를 주간으로 주고 받았다고 한다. 간절한 속죄의 제스쳐을까. 아니면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고 나서야 비로소 서로를 그리워 하고 용서하게 된 것이었을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 테이프 위에 적혀진 주소로, 우리는 할머니가 독일 어디쯤에서 삼십대를 보냈는 지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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