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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은 일주일

부고문

 장례식엔  누구도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누구도  죽음에 눈물 흘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누구도 나를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게 다야.



쓰고 나니  이런 말들이 나에게 튀어나왔을까 의뭉스러워진다. 어쩌면 정반대의 의미로 해석될지도 모르겠다.



 장례식에 모두들 와주지 않겠어?


 죽음에 눈물 흘려주겠니?


제발 나를 잊지 말아 줘.


그게 진심이야.




아직도 모르겠다.

어떤 것이 내 진짜 마음인지.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나의 자유의지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죽음 또한 나의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끔 생각한다.

죽음의 시기는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정하고 싶다고.

그것만큼은 내가 정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예고 없이 찾아오는 죽음.

괴로움에 가득 차 맞이하는 죽음.

의식하지도 못한 채 잠들며 맞이하는 죽음.


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누구나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단지 언제가 끝인지도 모른 채 의식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뿐.

영원히 살 것처럼 살지만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


만약 스스로 죽음을 정할 수 있다면,

정확히 일주일 뒤에 내게 죽음이 찾아온다면.

과연 남은 일주일 동안 무엇을 하게 될까?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속 어딘가에서

설렘이 속삭거리며 퍼져나간다.


사과나무를 심듯 평범한 일상이 좋을까?

묵혀 놓았던 버킷리스트를 실행해 볼까?

바쁘다는 핑계로 만남을 미뤘던 이들을 찾아가 볼까?

노후가 두려워 아껴둔 돈으로 플렉스나 해볼까?

.

.

.

막상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

속삭거리며 퍼져나가던 설렘이 일순간 잦아든다.

내게 남은 시간이 짧든 길든

어쩌면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냉정과 열정 사이, 정말 딱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삶에 대한 맹맹한 나의 태도 말이다.


내게 남은 일주일을 어떻게 보냈든,

지긋지긋했던 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

지난 삶을 회고하며 마지막 메시지를 남겨야 한다면.

.

.

우물쭈물 살다가 

 이렇게 죽을  알았다.

그렇다고 후회는 없다.

이제 나는 자유니까.




# 마지막 문장은 니코스카잔챠키스의 묘비명을  인용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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