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이 불행에 익숙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사는 가에 대한 답을 그나마
잘 설명해주는 것은 '욕구 이론'이 아닐까?
나는 어린 시절부터 무엇인가를 해야한다고 했을 때 늘 마음속에서는 '왜?'가 따라붙었다. 완벽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 스스로 납득할만한 이유를 만들지 못하면 내적 동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초등학생때에는 공부를 하지 않고 맨날 게임만하다가 전교 꼴찌를 하기도 했다. 그 이후에 나름 나만의 이유를 만들어가면서 스스로를 설득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니 스스로의 철학으로 나를 합리화시키기에는 허점 투성이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찾아가 심리학 서적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욕구 이론'을 만나게 되었다.
심리학자 메슬로우는 1943년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나누며 이에 대한 우선순위를 제시했다. 가장 기본적인 생리적인 욕구가 채워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안전에 대한 욕구를 추구한다고 했다. 심리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끼고 나면, 사람들은 애정 (사랑과 소속)의 욕구를 채우려고 한다. 그 이후에는 존경의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 순으로 달성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해당 이론은 말 그대로 이론일 뿐이었고, 많은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어렵고 예외사례들이 많다고 비판해왔다. 그럼에도 이 이론은 인간의 일반적인 욕구를 분석하고 5단계로 분류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이후에는 이를 더 단순하게 '존재의 욕구', '관계의 욕구', '성장의 욕구' 정도로 분류하는 시도도 있었고, 욕구에는 우선순위가 없이 복합적으로 생긴다는 주장하는 사람들도 등장하였다. 시대적 분위기가 바뀌면서 사회적 이론도 당연히 변화할 수밖에 없다. 메슬로우도 마지막에는 우선순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한다. 이론이야 어찌됬건 나의 철학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면 나는 환영이었다.
나를 매료시킨 '욕구 이론'은 학생들을 멘토링을 하거나 상담을 할 때 많이 활용하고 있다. 사람마다 중요시하는 욕구가 차이가 있으며 그에 따라 삶의 가치관이나 방향성이 자연스럽게 결정되곤 한다. 초기부터 자신의 자아탐색이 빠른 사람들은 외적 동기가 아닌 스스로의 '내적 동기'를 형성하는 능력이 생긴다. 이로 인해 타인에 비해 성장의 속도가 빠르고 확고한 가치관을 형성한다. 반대로 스스로와의 대화가 부족했던 사람들은 욕구의 우선순위가 뒤죽박죽이고 가치관도 남들의 의견에 의해 쉽게 영향을 받는다. 특히 청소년기부터 20대 시절에 '자아탐색 및 성찰의 시간'이 부족하면 타인이 중요시하는 것이나 피상적인 것을 멋모르고 따라하게 된다. 좋은 멘토를 찾으면 다행이지만 잘못된 길을 따라하게 되면 언젠가 다시 혼란의 시기가 찾아올 것이다. 예를 들어 본인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삶의 무력해지고, 인생의 허무해지고, 번 아웃이 찾아올 수 있다. 이런 시기는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는 때이다. 흔들리는 자신을 다시금 되찾아 더 공고히 할 수도 있는가하면, 아예 스스로를 놓아버리고 단순한 욕구로 덮어버리는 사람도 있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울증, 허무주의, 알콜 중독, 약물 중독 등으로 빠찔 위험도 있다.
현대사회에는 우울감에 빠지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다. 청년들이 이런 우울감을 주변 어른들에게 이야기할 때 어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많다. "네가 바쁘게 안 살아봐서 그래", "허구한 날 집에만 있지 말고 나가서 공부하던 일을 배우던 바쁘게 살아봐", "집에서 삼시 세끼 다 차려주니깐, 걱정이 없지 아주?", "우리 때는 밥 걱정하고 애 키우느라 정신없이 살아서 우울할 틈도 없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어떤 욕구에 집중하는지에 따라 삶의 양상이 다양하게 변하게 된다. 과거와 달리 우리나라는 끼니를 걱정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줄었다. 학생들은 과거처럼 학교를 다녀와 가시일을 돕지 않고,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오히려 부모들은 학생들을 '공부가 제일 쉽다'를 강조하며 사교육의 늪으로 보내기도 한다. 과거처럼 '내가 꼭 성공해서 집안을 일으켜야지' 혹은 '공부가 너무 즐거워서 학문에 매진해야지'라는 강한 동기를 가진 학생들은 더욱 적은 것도 맞다. 하기 싫은 것을 강요받는 학생들은 자연스레 '자아실현과 성장의 욕구'보다는 '애정의 욕구'를 중시하게 된다. 동성친구, 이성친구, 선생님,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안정감 등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결핍되거나 그들의 원하는 만큼 안정적이지 못하면 스트레스를 받고 우울감에 빠지는 것이다. 공부가 왜 중요한지? 그 나이에 온전히 이해하고 하는 학생들은 찾기 어렵다.
성인이 되면 본인이 추구하는 '욕구의 분배'와 '삶의 가치관'을 고민해봐야 한다. 앞서 말한 5가지의 욕구 중 '자아실현의 욕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결핍에서부터 시작되는 욕구이다. 즉, 최소한의 기준만 채워주면 해소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위의 그림처럼 사람마다 '욕구에 대한 갈망'을 분배하게 되는데 우리는 기본적으로 모든 항목이 결핍이 되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자아 탐색과 성찰이 필수)
1) 생리적인 욕구는 식욕, 수면욕, 성욕을 포함하며, 옷과 집에 대한 욕구까지 포함된다.
2) 안전에 대한 욕구에는 사회적인 질서, 통제, 안전한 사회, 가정, 의료에 대한 부분을 의미한다.
3) 애정의 욕구에는 우정, 친밀감, 사랑, 신뢰, 소속감 등과 같은 감정을 모두 포함한다.
4) 존경의 욕구에는 자존감, 평판, 존중, 인정 등으로 생각하면 된다.
5) 자아실현의 욕구는 발전하고자 하는 욕구, 잠재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성장 욕구를 말한다.
여기서 1, 2, 3, 4번의 욕구 중 하나라도 결핍된다면, 삶에 이유를 잃을 수 있을 만큼 심각한 상황으로 전환된다. 국가의 존재의 첫 번째 이유는 국민 누구에게나 1번과 2번이 결핍당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수준을 보장해야 한다고 본다. 지금 우리는 너무나 쉽고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2번은 '아프가니스탄, 일제강점기, 6.25 전쟁'만 보더라도 그 중요성을 다시금 되새길 수 있다. 꼰대스러운 말이지만, 한국에서 살기 싫다는 사람들에게 어디 가고 싶냐고 물으면 결국 선진국이다. 랜덤으로 주사위 걸려서 전 세계 나라 중 하나로 살게 될 것이라고 하면 누가 쉽사리 굴릴 수 있을까? 객관적으로 한국만큼 '개인에게 안정감을 주는 나라'는 많지 않다. 사실 3번과 4번에서 최소한의 안정감을 채운 사람들은 대부분 1번에 집착하게 된다. 최소한의 기준을 달성했음에도 갈망은 '질(quality)을 높이는 형태'나 '더 자극적인 쾌락의 형태'로 변화하게 되었다. 영양소를 채우기 위한 식사는 더 맛있는 음식 또는 더 비싼 음식을 먹는 방향이 변한다. 옷을 입는 문화도 명품을 추구하거나 브랜딩 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변한다. 성욕은 종족 번식이나 애정의 본능을 넘어 쾌락과 향락의 목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물론 3번과 4번도 최소한의 기준은 충족되어야 한다. 3번에서는 사람관의 관계나 소속감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경우에는 '스토킹'과 '가스 라이팅'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결핍되게 되면 비정상적인 자아 형성을 유발할 수 있다. 물론, 나이가 들고 가치관을 확립할 수 있는 시기에는 포기나 선택을 통해 '최소한의 기준'을 낮추기도 한다. 비혼 주의, 딩크족, 황혼 이혼도 유사한 사례가 될 수 있다. 4번 역시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가치이다. 가끔 뉴스에 등장하는 '묻지마 폭행'의 가해자들의 동기를 보면 '나를 무시했다', '나를 개만도 못하게 봤다'라는 이유로 충동스럽게 저지른 경우가 있다. 영화 기생충에서도 주인공(송강호)이 '냄새'를 통해 자신이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함을 느껴 충동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다. 그만큼 사람에게는 인정과 존중의 가치도 중요시하며 이는 오히려 남보다 가족, 연인, 부부, 친구 간일수록 더욱 신경 써야 할 문제이다.
사람들은 욕구를 어떻게 분배를 하고 있을까? 황금만능주의는 우리들에게 아주 강력한 욕망을 탄생시켰다. 바로 '돈에 대한 욕망'이다. 앞서 말한 대로 1), 2), 3), 4)가 최소한으로 만족될 때, 사람들은 1번으로 빠지게 되는 경향이 있다. 사실 행복감이란 모든 욕구가 최소한으로 만족된 후에 스스로 찾아야 할 감정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특정 결핍 기준을 스스로 높여가면서 직접 불행이라는 집을 설계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바로 20/30대들이었고, 코로나19 펜더믹과 2021년의 엄청난 인플레이션 (집 값 폭등, 코인 폭등, 주식 폭등) 속에서 득을 본 사람보다는 상대적 박탈감을 겪는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는 '집에 대한 욕구'는 유별나다. 집은 안전, 애정, 생리적인 모든 것들이 완성되는 공간이면서도 안전한 자산 및 투자처로 여겨지고 있다.
결국 앞선 욕구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집은 비단 단편적인 예시이고 복잡한 메커니즘 속에서 대부분 사람들의 욕구의 중심에는 '돈에 대한 욕망'이 생기게 되었다. 작금의 청년들은 셈을 해보기 시작한다. 내가 앞으로 벌 수 있는 돈으로는 지금의 혹은 미래의 집 값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마음 속에서는 '결핍의 기준선'이 높아지게 되고, 살아가기 위해 이를 낮추려면 포기라는 것을 해야 한다. 내 집 마련을 포기하거나, 연애를 포기하거나, 결혼을 포기하거나, 자녀 계획을 포기하게 된다. 근로소득으로는 그 갭을 매울 수 없으니 너나 할 것 없이 비트코인과 주식으로 뛰어들었지만 그 속에서 더 많은 패잔병들을 양산되었고,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더 커지게 되었다. 애석하게도 결핍되는 기준이 계속 높아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모르는게 약일 때도 있는 것이다. 현재는 과거보다 쉽게 SNS나 유튜브에서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잘 사는지를 늘 접하게 된다. 당연히 보여지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즐겁고 행복해 보이는데... 내 삶은 대비적으로 초라해보이니 점점 불행에 빠지게 된다.
안타까운 점은 개인이 손 쓸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박탈감을 느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서 끝내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이 많을까? 아니면 박탈감을 통해 무기력함과 우울감에 빠져 사람이 많을까?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두 경우 모두 공통점은 현재는 불행함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당장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욕구의 분배'라고 생각한다. 욕구를 한 곳에 많이 쏟는다고 해서 그 가치가 우후죽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결핍감의 기준을 함께 높여 더욱 불행과 가까워지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돈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가지는 사람들이 어느 수준에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서 "이쯤이면 충분해"하고 만족하고 그 기준을 다시 낮추기 어렵다. 이미 오랜 기간 불태워오던 욕망 열차는 관성이 생겨서 다시 돌이키긴 쉽지 않기에 이미 하던대로 연료를 더 공급하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이는 다른 욕구도 마찬가지다. 안전에 대해 집착하면 안전과민증이 생길 수 있고, 애정에 집착하면 타인에 대한 집착으로 발전하며, 존경에 집착하면 거짓된 이미지를 만들게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를 잘 파악하고 욕구를 균등 분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인가에 열정을 쏟더라도 욕구의 균형을 지키고 몸과 마음을 건강히 하며 언젠가 찾아올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분명 한 가지에 집착하며 사는 것보다는 행복감을 느낄 것이라 확신한다.
여기서 의문은 삶의 목표는 행복인 것인가? 내 집 마련인 것인가?
"집만 있으면 행복할탠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식의 가정은 누구나 쉽게 꺼내는 말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자. 이 사람이 집을 가져서 정말 행복해질까? 우리는 살아오면서 많은 가정들을 해왔다. "OO하면 참 좋을 탠데... 행복할 탠데..."하지만 그건 아주 일시적인 기쁨으로만 그쳤고 이미 지나간 일은 더이상 쳐다보지 않는다. 즉, 지금 행복할 줄 모르는 사람은 미래에 무슨 일이 발생해도 행복할 줄을 모를 것이다. 지금 당장 해야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꿈과 계획'보다 '매일을 행복하게 사는 나'를 만드는 것이다. 인생은 기다림과 버티기라고 하지만 그냥 하루를 손가락으로 세며 기다릴 바엔 매 순간들을 즐거운 요소들로 채워가면서 기다리는 게 어떨까?
결핍의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 욕구가 있다. 바로 '자아실현의 욕구'인데 성장의 욕구라고도 불린다. 자아실현의 욕구에서 결핍이 잘 적용되지 않는 이유는 모두 제로(0)에서부터 시작하고 타인과의 비교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 스스로의 발전을 보는 욕구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일이나 취미활동을 할 때 모두 입문자로 시작을 한다. 점점 익숙해지면서 숙련이 되고 스스로 만족감과 뿌듯함을 느낀다. 우연히 그 속에서 '숨겨졌던 재능'을 발견했다면, 그 과정에서 자존감도 올라가고 만족감은 배가 될 것이다. 자아실현을 통해 얻는 가치는 다른 욕구와는 다르게 하나씩 쌓아 올릴 수 있고 얻은 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달성해가는 과정에서도 다른 욕구들을 채워주거나 결핍되는 기준을 낮춰주는 '긍정적인 영향력'을 주기도 한다. 내가 늘 '사이드 프로젝트'를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서 기인된다. 우리는 자아실현을 통해 무엇인가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경우는 매우 적다. 오히려 타인에게 '원데이 클래스'나 '강습'을 통해 배워가면서 '새로운 즐거움'과 '성취감'을 느낀다. 이런 긍정적인 과정은 뜨거운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성취감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런 뜨거운 감정은 사람들에게 '살아있다'라는 기분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물론 케이스 바이 케이스)
나도 20대에는 '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스스로의 결핍되는 기준을 높여본 적이 있다. 그러나 성취감과 만족감이 주는 가치의 매력을 느낀 후로는 돈에 대한 가치관을 재정립하기 시작했다. 끊임 없이 돈을 버는 기계가 될 것인가? 쉽게 도전할 수 없는 가치를 추구할 것인가? 일단 젊기에 지금 나이에만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기로 결정했다. 그런 이유로 '자아실현의 욕구'와 직업을 일치시켜보고자 취업보다는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대학원을 졸업 하고도 대기업, 병원이나 약국에 가기보다는 '신약 개발'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스타트업에 뛰어들었다.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사람들'의 기준에서 보면 "도대체 왜?" 혹은 '면허증 안 쓰면 나줘라'라는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채우고자 하는 욕구와 일치시켰기 때문에 만족감을 느끼며 일을 할 수 있었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하더라도 내가 했던 선택들을 후회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유는? 건강하고 행복하게 하루 하루를 지내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