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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

무계획도 계획이다

by 강준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지인이 있다. 주기적으로 만나다 보니 가끔 차를 마시며 일에 대한 이야기나 삶에 대한 고민을 나누기도 했다. 볼 때마다 밝은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대화를 해보면 정신적인 건강함을 잘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며칠 동안 보지 않다가 오랜만에 일적으로 다시 그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한눈에 '이 친구 상태가 안 좋구나'라는 것을 파악했다. 겉으로만 봐도 눈 밑에 다크서클이 심했고, 얼굴이 약간 노란빛이 돌면서 눈에는 총명함이 사라져 있었다. 직업병 때문인지 상태를 보고 현재 상태를 진단하려는 습관이 있다. 약간 황달기가 있어 보였는데 아마 만성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간 기능이 떨어진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물어보니 최근에 술자리도 많이 가졌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일 얘기를 하면서 최근에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봤다. 무슨 큰 사건이 있던 것은 아닌데 앞으로 이 일을 계속해야 할지? 본인이 추구하는 삶과 현실 사이에의 괴리감이 생겼다고 했다. 평소에 본인의 속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 사람인지라 이야기를 길게 하지는 않는 편이었는데 그날따라 갑자기 울컥하곤 다시 참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스스로의 증상을 '번아웃 증후군'으로 진단까지 내려둔 상태였다. 가끔 일적으로 보는 사이다 보니 그 사람의 삶에 관여하기는 어려웠고, 가볍게 심리 상담이나 우울증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만남을 마무리했다.


며칠 뒤 그를 다시 만났다.

상태는 더욱 심해진 것 같았다. 말을 돌려 돌려 물어봤지만 본인 스스로 '우울증'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심리 상담이나 병원에 가보는 것을 추천해보았지만 자기만의 이상한(?) 논리를 펼치면서 치료가 안 될 것이라 주장하였다. 모르는 사람이 내용만 들으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렇게 말하는 행위 자체도 지금 마음의 병에 걸려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러면 어떻게 지금의 상태를 해결하려고 하는지 물어보았다. "글쎄요. 다 귀찮네요. 그냥 아무도 없는 곳으로 내려가서 조용히 살고 싶네요."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그는 쉽게 직장을 그만두고 떠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말 수는 적고 생각은 많고 본인만의 철학이 확고하다. 게다가 스스로 자기 객관화가 매우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잘 진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면 속에서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기에 개선의 의지나 동기가 생기지 않는다. 이런 성향으로 타인의 조언을 쉽사리 수용하지 않다 보니 상담 자체에 대한 신뢰도 적은 편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갖는 고민들은 대게 자신만의 가치관과 철학이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기에 주변에서 본인을 잘 이해해주지 못할 것이라 착각한다. 그래서 애초에 타인에게 자신의 속 이야기를 잘 안 하고 마음의 문을 닫는 편이다.


사실 해법은 단순하지만 스스로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혼자 짊어진 듯 살아가고 있지만 가끔 놓아버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는 해법을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은 좋지 않다. 이상한 자존심 때문인지 절대 그것만큼은 안 하려고 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래서 은근슬쩍 정보를 흘려서 본인이 내 대화 속에서 실마리를 찾는 같은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직접적인 조언보다는 넌지시 대화 속에서 '몇 가지 사례'들을 가볍게 던져보곤 했다.


그중 하나는 나의 번아웃 극복기였다.


나도 과거에 스스로의 생각에 갇혀서 번아웃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이미 내 사고 회로 속에서는 해답을 내지 못했기 때문에 빠지게 된 상황인데 그 속에서 번뜩이는 개선점이 떠오를 리가 없었다. 그러던 와중 '훈련소'에 입소하게 되었다. 훈련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으로 나를 속세와 단절이 시키다 보니 머릿속의 끊임없는 사고를 정지시켜주었고, 그 속에서 평생 해본 적 없는 '가볍게 생각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다. 사실 머리를 비울 수 있다는 경험은 나에게 충격적이었다. 지금까지 늘 복잡하게만 살아왔었고, 그런 생각들이 얼마나 나를 괴롭혀왔는지 몸소 경험하게 된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철저한 분리와 비우기'였다. 생각이 많은 사람들은 삶의 다양한 역할(직장에서의 나, 가족에서의 나, 연인에서의 나, 친구들과의 나 등등) 속에 복잡하게 얽매여 있다. 퇴근 후나 휴일에는 전원을 끄듯이 다른 역할군들을 철저하게 OFF 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온전히 모든 것을 비우고 나서야 하고 싶은 것이 생기고,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여유가 생기고, 무엇인가에 몰입을 할 수 있게 된다.


무계획도 계획이라는 말이 있다.

생각하기 위해 생각하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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